한 번 핀 꽃이 결코 지지 않는다면 세상은 꽃으로 가득할 것이다. 장마철 침수된 반지하 창고에 핀 곰팡이처럼 꽃은 온 세상에 창궐할 것이다. 세상은 꽃으로 가득 덮혀 꽃의 바다로 불릴 것이다.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듯, 꽃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세상, 그런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일까? 끔찍한 세상일까?
꽃을 아름답다 여기는 것은 떨어지기 때문이다. 곧 사라지기 때문이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죽는다는 알기 때문이다. 삶은 요리하는 시간, 이슬이 떨어지는 순간, 한 여름 짧은 꿈, 스치는 웃음이다. 유한함, 짧은 시간, 추락, 사라짐이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이란 사그라듦이다.
허망함, 유한함, 영원하지 않음, 지속가능하지 않음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안고 사는가? 경제적 지속 가능성, 오늘 먹은 맛있는 음식을 평생 먹을 수 없을 거라는 한탄, 여행기간 내내 비싸고 멋진 숙소에 머물 수 없다는 아쉬움. 좋아하는 것이 지속될 수 없다는 고통, 지속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삶을 지배한다. 이루는 것과 지속하는 것은 다르다. 지속가능성을 위해서 공부하고, 대학을 가고,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번다. 삶의 목표는 지속가능함이다. 삶의 분투란 허망하게 사라질 삶을 끝끝내 부여잡고 뭔가 지속적으로 해보려는 몸부림이다. 작고 짧게는 생명의 유지, 길고 크게는 사회적 인정과 힘을 얻기 위한 몸부림이다. 힘은 경제력과 권력이다. 그래서 인간은 힘을 갈망한다. 힘은 돈이다. 돈이 없다는 것은 힘이 없음이다. 힘이 없다는 것은 변화도 지속도 가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힘이 없다는 말은 영향력이 없다는 말이다. 영향력이 없다는 말은 존재가 흐려진다는 뜻이다. 투명인간, 무시되는 존재, 냉대받는 존재,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는 존재, 생각이 있어도 구현되지 않는 존재, 삶의 고통 대부분은 힘으로 연결된다. 힘은 에너지다. 에너지의 지속가능함이 삶의 목표다.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점점 더 많이 쓰는 삶을 갈구한다.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지속가능한 보증 없이 살아가는 것은 삶의 불확실성이다. 불안이다. 걱정이 생긴다. 자학, 자괴, 무기력이 움튼다. 우울해진다. 꽃이 시든다. 그 짧은 시간도 시든 체 억지로 매달린 꽃이 된다.
찰나의 존재, 인생이 일장춘몽이라는 깨달음으로부터 어떤 사람은 허무감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용기를 느끼고, 어떤 사람은 걱정을 덜고, 어떤 사람은 더욱 욕망에 집착하며, 어떤 사람은 슬픔을 느낀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날카로운 아름다움을 느낀다. 강렬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미의 근원은 죽음이다. 미의 구성은 탄생과 죽음이다. 탄생을 지속하는 존재는 아름다움이 없다. 암세포란 탄생을 지속하는 존재, 존재를 확장하는 존재다. 암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사라짐이다. 아름다움의 전제는 태어남이며 아름다움의 완성은 죽음이다.
어떤 사람은 찰나같은 인생을 깨닫고 비로소 아름다움을 깨닫는다. 설레는 마음으로 순간 순간을 살아간다. 설렌다. 가슴 뛰는 겸허함이 삶을 지배한다. 겸허해진 설렌다 한 방울 떨어지는 물방울같은 삶, 물방울 같은 하루, 물방울같은 유년시절과 사춘기, 곧 떨어질 꽃같은 젊은 시절. 꽃은 곧 진다. 늙어감이여. 그리고 삶이여, 아름답고 아름답고 고귀함을 느낀다. 삶이 찬란해진다. 그러니 슬픈 마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을 시간이 없다. 그가 누울 때는 오직 쉼이 필요할 때다. 쉼은 마음이 말하지 않는다. 몸이 말한다. 몸이 말하는 쉼이 진짜 쉼이다. 몸이 말하는 쉼이 정직한 쉼이다. 마음의 속삭임, 뇌의 속삭임에 속지 않는다. 쉼을 결정하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몸이다. 몸을 움직여라, 살아 있는 존재는 몸을 움직임으로서 아름다워진다. 찰나에 몰입해 산다는 것은 행동이다. 그런 행동은 아름답다. 마음이 담긴 행동은 아름답다. 죽음과 삶을 초월한 행동은 아름답다. 그런 행동들이 아름다운 삶을 만든다.
살아보기도 전에 재가 되는 삶이여
아무리 좋은 말을 들어도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많다. 마음의 모양 때문이다.
마음은 어떤 모양인가? 마음은 움직인다. 마음의 입구가 바뀐다. 입구는 넓어졌다 좁아졌다를 반복한다. 좁아질때는 거의 틈이 없어진다. 넓어질 때는 존재 자체가 없어질 정도로 넓어진다. 무엇이 마음의 모양을 바꾸는가? 마음이 바꾸는가? 조건이 바뀌는가? 마음의 다른 말은 바로 자아다. 자아. 나라고 느끼는 것, 나라는 정체성, 나의 존재, 나의 몸, 나의 감정, 나의 생각들이다. 자아는 방어적이다. 자아는 공격적이다. 자아는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좋아한다. 자아는 스토리를 만든다. 자아는 드라마틱한 것을 좋아한다. 자아는 지루함을 참지 못한다. 자아는 쉽게 중독된다. 자아는 이기적이다.
많이 알면, 제대로 알면, 마음이 따라서 언젠가는 변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과연 그런가? 우리는 변했는가? 변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마음의 모양을 알아야 한다. 마음의 모양을 안다는 것은 마음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막무가내로 말을 듣지 않고 문제되는 행동을 하는 아이를 바꾸는 것은 어렵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바뀌나? 아니면 아이를 제대로 이해하면 바꿀 가능성이 높아지는가? 그 아이가 우리다. 우리는 그 아이의 상태에서 얼마나 많이 변했나? 본질은 같다. 우리에는 앎이 필요하다. 마음의 모양을 안다는 것은 마음을 아는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 말한다. 인간은 뭔가 이해되지 않을 때 답답해진다. 그 이해되지 않음이 임계점을 넘으면 삶은 고통이 된다. 배신 당하고 나를 버림을 당했다는 사실보다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모를때 더 고통스럽다. 우리는 이유를 알고 싶다. 사실, 진실을 알고 싶다. 삶을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삶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이해가 되면 견딜 수 있다. 시작과 끝이 있다. 어디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게 된다. 의미와 목적을 알게 된다. 그런 이해의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 종교다. 오랜 세월동안 유효했다. 지금은 그런 종교의 효용성이 많이 줄어들었다. 예전같지 않다. 예전에 삶의 문제, 종교의 문제는 주로 마음의 문제였다. 마음에 달린 문제였지만, 지금 종교의 문제는 돈의 문제가 되었다. 마음의 문제는 마음 자체의 변화로 인해 해결이 되었다. 하지만, 돈의 문제는 마음을 달리 먹는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고 목소리를 높인다면 보이스피싱의 다른 버전이다. 마음은 돈과 쉽게 연동되지 않는다. 이 지점을 파고드는 것이 자기개발이다. 새로운 신흥종교다. 이렇게 마음을 먹으면 돈을 번다. 성공한다. 관계가 좋아진다. 문제가 해결된다 등의 연결성을 강조한다. 그럴듯하게 보일뿐이다. 삶을 결정하는 수백만가지 변수 중에 몇 가지만 바꾸면 다 된다는 접근은 옛날 길거리에서 팔던 만병통치약과 다름없다. 수단에 현혹되어 삶을 소모하지 말아야 한다. 삶의 목적은 아름다움을 느끼며 환희로운 설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말이 낯설게 느껴지면 죽음을 너무 멀리 두고 산다는 뜻이다. 삶을 삶답게 만드는 것은 죽음의 자각이다. 꽃이 지는 것은 탄생이고, 꽃이 지는 것은 죽음이다. 삶은 폈다가 지는 것이다. 지는 슬픔이 아니라, 피는 기쁨을 바라보는 것. 아직 떨어지지 않았음을 감사히 여기는 것. 떨어질 것 같은 다른 꽃을 돌보는 것. 새로운 꽃이 피게 도와주는 것. 곧 사라짐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아름다움이다. 사라져야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