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친구는 함박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자신의 집에 가려면 산과 강을 몇개씩 넘고 건너야 한다는 말은 상징적 의미가 담긴 농담인줄 알았다. 게스트하우스 사장에게 부탁해 3일 휴가를 얻는 샴과 나는 그의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정류장 표시가 없는 곳에 내린 우리는 큼직한 배낭을 매고 걷기 시작했다. 걷고 또 걸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부터 걸었는데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5개의 산을 산허리를 타고 넘어갔다. 무릎 깊이와 허벅지 깊이 강을 각각 건넜다. 난 두번 놀랐다. 샴의 말이 사실이라 놀랐고, 버스 다니는 길에서 걸어 7시간 안에 도착하는 네팔 마을은 초역세권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샴의 고향집은 버스길에서 걸어서 5시간 거리에 있었다. 그 정도면 초초역세권이다. 한국으로 치면 지하철 출구로 걸어나와 15미터 거리의 집이란 뜻이다. 네팔에서 산길을 1박 2일 정도 걷는 건 출근길이다. 오랜만에 집에 갔다가 학교로 출근하기 위해 10시간째 걷고 있는 교사를 안나푸르나에서 만난 적이 있다. 중간 마을에서 하루 밤 자고 내일 반나절만 더 걸어가면 직장에 도착한다며 웃었다. 버스길에서 1주일, 보름, 20일 넘게 걸어야 도착하는 마을들이 숱하게 많다. 대부분 평생 마을을 떠나지 않는다. 산간마을 아이들은 큰 병에 걸리면 대부분 죽는다. 큰 대나무 바구니인 도카에 아이를 태우고 남루라는 끈을 묶어 등에 지고 산길을 총총걸음으로 내려오다보면 아이의 몸이 차갑게 식어버린다. 머물렀던 5시간 거리의 초초역세권 마을의 아이들은 3일 정도 나를 괴물 대하듯 했다. 이방인을 구경하러 온 아이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줄행랑을 쳤다. 외국인은커녕 외지인을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탓이다.
샴의 아버지는 새벽 5시부터 논에서 일다가 11시쯤 집으로 돌아왔다. 간단한 점심을 먹고 집안일을 하다가 오후 3시쯤 다시 일하러 나갔다. 그는 해질녘이나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밥은 깜깜한 밤에 먹었다. 일년에 360일 정도 일한다고 했다. 힌두 명절과 같은 중요한 날 5일 정도는 쉰다고 했다. 그렇게 일년 내내 잠자는 시간 빼고 산과 집에서 일하면 9개월 정도 먹을 식량을 마련할 수 있다 했다. 나머지 3개월은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샴에게 물었다.
“그게 내가 카트만두에 일하러 간 이유죠.”
샴이 카트만두 게스트하우스에서 번 돈을 보내주면 그 돈으로 쌀을 사서 나머지 3개월을 버틴다고 했다. 샴은 도시에서 살고 싶거나, 일이 하고 싶거나, 더 큰 비전을 찾아서 고향을 떠나 카트만두로 온 것이 아니었다. 단 하나의 이유. 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도 살고 가족들도 살리는 길을 찾아 도시로 도시로 온 것이었다.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 그들의 삶이 힘든 이유, 그렇게 열심히 농사일을 해도 배고픈 이유가 있었다. 바로 계단식 논이다. 산악지역의 비탈길에 층층이 순수한 핸드메이드로 만든 계단식 논. 벼농사를 할 수 없는 곳에서 땅을 확보하는 획기적인 방법, 하지만 스콜이 쏟아지거나 우기가 되면 여기저기 터져버리는 계단식 논, 끝없이 물을 길러대야 하는 계단식 논, 하루 종일 터진 땅을 흙과 돌로 보수하고, 물길을 보수해야 하는 계단식 논, 천형처럼 물과 흙을 지고 나르고 옮기고 다루어야 하는 계단식 논. 계단식 논에서 먹고 살기 위해 일한다는 건 시지푸스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었다.
지난주에 남해 다랭이마을을 다녀왔다. 네팔에서 한 달을 머물며 계단식 논을 질리도록 보았기 때문에 별 것 없을 거라 생각했다. 기대보다 훨씬 좋았다. 전혀 다른 환경이었고, 생각할 것도 많았다. 암석 기반의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이 눈에 갔다. 산꼭대기서부터 해안까지 흐르는 물, 비온 뒤라 폭포처럼 수량이 풍부했다. 자연이 만든 수로가 없었다면 다랭이논은 엄두를 못내었을 것이다. 발리 섬 전역을 거미줄처럼 촘촘히 잇는 그들 조상들이 폭 40~50센티미터의 혈관처럼 놀라운 수로가 떠올랐다. 남해 다랭이마을 논농사는 몇 명이서 기계로 짓는다고 했다. 농사를 지으면 그 댓가로 정부에서 돈을 준다고 했다. 먹고 살기 위한 농사가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농사다. 좋게 말하면 문화를 보전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만든 페이크다. 다랭이마을을 다녀오고 나서 계속 네팔이 떠올랐다. 20년 전의 여행이지만 어제의 여행처럼, 내일의 여행처럼 계속 생각난다.
네팔에서 한국에서 돌아온지 몇 년 뒤, 샴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56세로 기억한다. 제대로 못 먹고 과도한 노동을 평생 한 삶이다. 그가 산 56년 중 50년은 일년 중 360일, 새벽 5시부터 저녁 8시까지 쉬지 않고 일했으리라. 그쯤 샴은 일본으로 일하러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 어쩌면 한국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죽기 전에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 국적불문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볼때마다 항상 눈여겨 보는 이유다. 모두 샴같다. 피를 나눈 적 없지만 동생같은 존재다. 짧은 만남이 씨앗이 되어 내 속에서 점점 자라는 것. 여행은 그런 것이다.
샴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일했던 다랭이논.
한국에도 그런 다랭이논이 있었다. ‘있다‘가 아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