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경북교육청이 있는 포항을 다녀왔습니다. 도내 공업계열 진로교사를 대상으로 <진로역량 강화를 위한 특성화고의 역할>이라는 답답한 주제로 2시간 특강을 했습니다. 답답한 주제라 한 건 현실 속에서 명쾌한 답을 찾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특성화고 문제의 핵심은 취업이고, 고용의 문제는 온 나라가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부어도 풀기 힘든 문제죠. 어설픈 해법, 관념적 해법, 부분적 해법을 자신만만하게 제시하다가 비판받기 십상인 주제죠. 그래서 핵심주제를 생각하고 생각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하며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은 조각을 하듯 빼고 또 빼다 보니 핵심 메시지의 고갱이가 차츰 드러났습니다. 공룡화석처럼 드러난 뼈조각은 <진로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처럼 보였습니다. 진로교육의 목적을 생각하는 일은 여행과 비슷한 것 같았습니다.
연인과의 여행을 보는 극단적 두 주장이 있더군요. <사랑하는 사람과는 절대 여행을 떠나지 마라>는 주장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꼭 여행을 해봐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전자는 사랑을 지키려는 목적이, 후자는 사랑을 검증하려는 목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커플은 함께 떠났다가 따로 돌아오기도 하고, 어떤 커플은 어색한 거리를 두고 떠났다가 찰싹 붙어서 돌아오기도 합니다. 여행 전후가 똑같은 커플도 있고요. 적어도 겉으로요. 여행이라는 설레면서도 피곤한 경험을 통해 전혀 달라지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여행의 경험은 방사능에 노출되는 시간처럼 당장은 달라지지 않아도 살면서 삶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죠. 아무리 일관되고 무던한 사람도 여행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시시각각 변하는 인간인지 알게 됩니다. 자신이 싫어지기도 좋아지기도 하지요. 하물며 다른 사람과 팽팽하게 호흡을 맞추는 공동의 경험을 항상 기분 좋게 유지하는 일은 참으로 만만치 않습니다. 혼자의 여행이든 함께의 여행이든 여행이 어렵고도 재미있는 이유는 <선택>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선택 때문에 고독을 느끼고, 웃고, 싸우고, 돌아서고, 가까워지니까요.
일상의 삶도 그렇듯 여행을 떠나면 <선택>의 문제를 풀어내야 합니다. 정해진 시간 동안 어디를 갈지, 무엇을 먹을지, 어떤 콘셉트의 여행을 할지, 우연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치열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작정하고 떠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녹화장치 없는 CCTV처럼 텅빈 머리로 멍하게 보기만 하며 정처없이 거니는 골목길에서도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되돌아갈지, 계속 앞으로 걸어갈 지 선택해야 합니다. 다리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멍때리며 한 곳에서 하루를 머물든 한 달을 머물든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을지 끊임없이 선택해야 합니다. 아쉬운 여행지를 떠나며 마지막 식사를 할 장소를 결정한다는 것은 아직 가보지 않은 수많은 식당들을 결국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한 곳에 아무리 오래 머물러도 모든 곳을 다 가볼 수는 없기 때문에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행을 잘한다는 것은 선택을 잘 한다는 뜻 같습니다. 잘 산다는 것도 선택을 잘 한다는 뜻 같습니다. 진로교육의 목적도 선택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일까요?
진로문제는 자신에 맞는, 자신이 원하는, 자신에게 좋은 선택을 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머리로 선택한다고 해서 그 경험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경험을 대하는 방식도 제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직업이든, 공부든, 인간관계든 인간은 선택을 통해 무언가를 경험합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고, 주저앉고, 절망합니다. 때로는 희열을 느끼고 때로는 목숨을 스스로 끊기도 합니다. 모두 경험 때문입니다. 치열한 고민을 해서 선택한 경험이었지만, 후회만 남을 수 있고, 원하지 않았던 경험인데 너무나 가치있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경험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경험을 대하는 태도 같습니다. 좋은 여행과 좋은 삶을 위한 비결은 경험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과 선택 후에 그 경험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여행지에서의 선택은 <어떤 여행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되고, 인생에서의 선택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되듯, 진로선택의 문제는 어떻게 삶을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과정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진로교육의 목적은 자신이 원하는 경험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 그렇게 선택한 경험을 자신에게 도움되도록 만드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아닐까요? 즉 경험에 대한 <선택과 태도>가 진로교육의 척추뼈가 아닐까요? 뇌가 몸을 움직이듯, <이유>가 선택과 태도를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였던 빅터 프랭클은 자신이 아우슈비츠에서 갇힌 경험을 담아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썼습니다. 살아나갈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도 사라져 동료가 삶을 포기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지옥에서 꼭 살아 나가야 이유를 찾았고, 그 이유 때문에 버티고 버텼다고 합니다. 자신은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나는 일을 연구하는 철학자이고, 꼭 살아나가서 그 연구성과를 세상에 알리겠다는 것이 그가 살아야 할 이유였다고 합니다. 진로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다양한 직업정보를 알려주는 것도, 취업역량을 길러주는 것도, 성적을 올려주는 것도, 직무역량을 길러주는 것도,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갈래의 강물이 흐르고 흘러서 결국 바다로 가듯, 진로교육의 여러 활동과 내용, 세부적 목적의 궁극적 지향점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인 각자의 삶의 이유를 찾게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과 삶 사이에서 삶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이유, 자퇴와 재학을 고민하며 등교하는 이유, 퇴직과 재직 사이의 갈등에서 오늘 기어코 출근하고야 마는 이유, 대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일 속에서, 이 경험 속에서 기어코 내 삶의 이유를 찾아내려는 마음의 태도를 길러주는 것이 진로교육의 궁극적 목적 아닐까요?
이 자격증 따고, 이 공부를 하고, 이 학교를 졸업하며, 이걸 하며 이 직업을 갖게 될꺼야가 아니라, 그 직업이 지닌 가치, 의미를 바닥까지 파고 들어가는 집요함. 자신과 직업에 대한 질문과 문제제기, 벌거벗은 자신과 세상에 당당히 대면하는 힘, 나약하고 순간순간 생각이 바뀌는 자신, 만만치 않은 세상, 변절하는 세상, 내가 바라는 모습이 아닌 세상에 맞서 싸우고, 자신의 생각을 당당히 표현하는 힘, 문제를 해결하는 힘, 그런 것이 진로역량 아닐까요? 각자의 삶의 이유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 남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찾아 그 욕망을 자신만의 삶의 이유로 이어지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로교육의 목적 아닐까요? 꿈이라고도 부르는 자신만의 욕망으로 세상과 나를 연결지어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 즉 각자의 삶의 이유를 찾게 도와주는 것이 진로교육의 보편적 목적이 아닐까요? 특정 직업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직업이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내며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진로교육의 궁극적 목적이 아닐까요? 궁극, 보편이라는 말을 붙일수는 없어도 적어도 진로교육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