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직선을, 삶은 곡선을 달리는 불균형”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의 영화를 두 개째 보는데 팬이 되어버렸다. 일상적인 사건을 일으킨 후, 그 영향에 있는 인간들의 애매하고 복합적인 상황에서의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는, 아주 어려운 이야기를 자연스레 풀어낸다. 주변 인물들까지 단순한 입장의 인물은 한 명도 없다. 그러다 보니 관객들도 누구를 어디까지 증오하고 동정하고 응원해야 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딜레마를 끝까지 안고 영화를 관람하게 된다. 드라마라는 장르에 정말 적합한 영화를 만들어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함께)
특히 이번 영화는 같은 편이라 볼 수 있는 부부 사이에서도 점차 갈등이 고조되어 부부 사이 내적 갈등, 피해자인 부부와 가해자 간의 갈등, 그리고 그 집을 소개해준 친구와의 갈등 등 여러 문제들이 섞이며 진짜 뭐가 문제인지 뭐부터 정리해야 하는지 혼란을 가미시킨다. 자질구레한 현실적 문제를 제거한 극적 갈등을 위주로 재편되는 보통의 영화 플롯과 달리 너무 현실적으로 복합적 문제를 가져와 버려 보는 내내 짜증과 답답함까지 몰려온다. 가해자를 찾아야 하는데 그냥 잊고 집이나 알아보자거나, 혼자 있기 싫다고 갑자기 출근하는 남편을 못 가게 하려는 거나, 샤워하기 무섭다며 무너져 가는 건물로 굳이 가서 샤워하는 것들은 영화적 갈등 전개에 방해가 된다.
갈등의 전개뿐만 아니라 해결에서도 마찬가지다. 갑작스레 아내는 가해자의 응징을 반대하고 나서는데 이게 여간 답답한 게 아니다. 그러나 피해자는 정작 부인이고 남편은 피해자의 대변인일 뿐인데, 피해자 본인이 부정하는 분노는 정당하거나 유지할 명분이 없다. 인과응보니 끝까지 간다는 거니 모두 극적인 상황 속의 극적 선택일 뿐, 현실은 피곤하니까 그만하자는 식의 명쾌하지 않지만 실용적인 삶의 선택이 존재하는 곳이다.
이렇듯 영화는 큰 줄기의 사건을 발생시키지만 그 사건의 ‘해결’ 혹은 ‘복수’에 방점이 있지 않다. 그보다는 사건에 의해 영향받는 사람들, 그들의 관계와 생활, 명료하지도 명쾌하지도 않은 현실의 선택, 선과 악으로 나누기 힘든 인간의 상황들을 보여준다. 이 지점이 바로 라나가 에마드에게 지옥 같은 삶을 사는 동안 뭐했냐고 일침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에마드는 모든 수를 다 써서 열심히 가해자를 찾아 복수하려 하지만, 라나에게는 지옥 같은 일이 일어나서 힘들어 이사 가고 샤워하는 게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영화 속 부부가 주연하는 연극은 에마드가 바라는 복수처럼 시작과 끝이 있는 선형이다. 하지만 삶은 시작과 끝도 없고 이미 끝난 사건으로 감정이 다시 되돌아가기도 하고 같은 얘기를 또 하기도 한다. 플롯이 아닌 진짜 삶은 그렇게 뒤죽박죽이다. 그래서 영화 속 연극은 무사히 끝나지만, 끝난 무대 뒤 배우였던 에마드의 얼굴은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듯 개운하지 못하고 무거운 얼굴로 남아있다. 그렇게 에마드의 얼굴을 한참 보며 영화는 끝난다. 영회는 끝났지만 영화 속 그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