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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링스 Aug 24. 2019

올라가는 건 외로운 거야

점심 로테이션이라는 비화(悲話)

“점심 약속 없는 사람?”


조용한 사무실, 몇몇은 떠나고 몇몇은 남은 정오. 이 말이 떨어지는 순간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리고 다가오는 소리. "한대리, 점심 약속 없지?" 미처 대답을 준비하지 못한 한대리. "아 예 뭐..." 다가오는 발소리. "최과장, 약속 없지?" 다행히 한대리를 거쳐오는 동안 최과장은 준비를 마쳤다. "저는 좀 이따 치과 예약해둬서요. 죄송합니다." 충분한 시간 후 마지막 타자. "준범아, 약속 없음 같이 가자". "아, 저 약속이 있어서...", "누구?". "네? 저 동기들하고.." "여러명이서 가는 거면 안가도 돼. 야 한 대리. 준범이하고 본부장님하고 네명 예약 좀 해줘라"


다른 회사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내가 다니는 회사도 조금씩 사라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점심 로테이션의 풍경이다. 암묵적으로 본부장님의 식사를 위해 각 팀장들은 월별로 날짜를 할당 받았고, 실장조차 내빼는 날이면 팀장 혼자 1:1 본부장 면담으로 점심을 보낼 수 없기에 하이에나처럼 직원들 사냥을 나선다.


나는 늘 생각한다. 본부장은 혼자 밥 못 먹나? 여전히 모르겠다. 자존심 때문일까. 아니면 혼자 먹을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하고 거품충성에 휘말린 탓일까? 본부장은 바뀌어도 점심 로테이션을 돌리는 팀장들은 여전한 걸 보면 본부장 만의 문제는 아닌 것도 같고, 잘 보이기 위한 치킨경쟁으로 시작된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본부장이 되질 않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잘못된 것이다. 누군가(직원들)의 불행을 담보해 유지되는 건 줄지 않는 빚과 같다. 그러다 연체가 생기듯 직원들은 말도 없이 조용히 퇴사를 해버린다. 


사실 그림으로 그려보면 너무 명확하다. 본부장은 1명, 실장은 4명, 실장 아래 팀장 3명씩 12명, 각 팀당 12명씩 144명. 사원은 사원끼리 친하고, 과장은 과장끼리 친하고, 팀장은 팀장끼리, 실장은 실장끼리 있을 때 가장 구조가 맞다. 그럼 본부장은 본부장끼리 있으면 되는데, 본부장은 10명이 채 안되기 때문에 한 두 번 같이 먹고나면 쿨타임 도는데 몇 달은 걸린다. 그래서 점심시간이 빈다. 그걸 실장이 채우기에는 실장 수가 모자르다. 한 달 로테이션을 실장 기준으로 돌리면 요일 한 두개씩은 맡아야 하고, 아무리 언변이 좋은 실장도 소재거리가 떨어진다. 그래서 보통 로테이션은 팀장들이 차지한다. 1명을 맡는 12명의 전사. 한 달에 한 번, 아니면 두 번이다.

그래서 팀원들까지 내려오는 건 한 두달에 한 번이긴 하다. 그럼에도 그것은 세 단계 위 사람과의 식사이기 때문에 지독히 괴롭고 비싼 밥조차 가성비가 떨어진다. (몇몇 예외적인 직원들이 있긴하다. 초밥 사주면 바로 따라가는) 


아무튼 이 구조에서는 결국 팀장들이 부담하고 팀원들이 가끔 같이 부담하는 구조인데, 정확하게는 본부장 혼자 부담해야하는 상황이다. 혼자 외로워지는 것이 정답이란 뜻이다. 이유는 그만큼 돈을 많이 받고, 그만큼 일을 시키고, 그만큼 위엄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올라갈 수록 외로운 건 당연하다. 자식보단 가장이 외로운 것처럼, 학생보단 선생이 외로운 것처럼, 대통령이나 영화감독, 수 많은 리더들이 외로운 것처럼. 


그래서 이제 겨우 매니저 수준에 머무는 나도 혼자에 익숙해지려 노력 중이다. 사원들에게 말을 걸면 웃어줄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거기에 익숙해지면 벗어나기 힘들다. 올라가는 건 외로운 거다. 올라갈 맘이 있다면 미리 외로움에 익숙해지자. 다행히 시대도 이런 나를 위해 회사에 헬스장을 만들어줬고, 에어팟과 유튜브를 마련해줬고, 혼밥이 트렌드가 되어준다. 


이 참에 본부장도 트렌드를 한 번 따라가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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