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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링스 Sep 07. 2019

거대한 시대 속 작은 사람의 따듯한 사랑의 기억

로마 (2018)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영화의 사실성은 극대화되는데, 모든 상상력이 구현되는 이 시대 영화에 완전 배치되는 사실성을 선보인다. 그리고 카메라를 끊지 않고 쭉 따라가는 패닝과 틸팅을 많이 쓰는데 다큐같다고 느껴지면서도 뮤직비디오 같기도 했고, 심심하지만 의외로 카메라를 따라다니며 시선 집중은 잘 되었다.

아무래도 암울하고 혼잡한 시대의 하층민의 삶을 다뤘기 때문에 무겁고 진중해지고 별 거 아닌 일에도 괜히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긴장이 됐다. 다행히 그런 극적 사건과 비극은 없었고, 오히려 상처 속에 사랑이 피는 아름다운 영화였다. 잔잔하고 따뜻했다. 너무나 평범한 모습의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일들만 했기에 시청자인 나에게는 별 거 없었지만, 그런 그들에게는 인생이 무너지는 상처, 목숨을 건 희생, 평생 안고 갈 위로를 겪는 인생의 극적인 사건과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진짜로서 울림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영화는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아 뇌가 조급해지며 지루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는 사건이 자극적이지 않아도, 머리를 쓰지 않아도, 시각과 청각으로 긴장을 만들어내지 않아도 의미가 있음을 보여준 영화다. 현실을 고발하는 예술영화들의 날 선 비판 의식과도 결을 달리한다. 이 영화에서 정부나 남성의 권력과 무책임은 비판할 것이 아니다, 그때 그랬던 거니까. 이건 그런 억압과 차별과 상처가 존재했던 이건 그저 슬펐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고맙고 따뜻한 기억이다. 그래서 옥상에 누워있던 클레오와 아이의 모습이 별 거 아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모습이고, 아이들을 구하러 클레오가 바다로 뛰어가는 장면은 위급한 장면이지만 따스한 햇살 속에서 큰 위기 없이 구해내는 것이 아니었을까.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요즘 SF에 심취했고, 원래가 머리 쓰는 영화를 좋아했다. 상상과 추론 이건 영화를 보는 나의 가장 기본자세이자 태도였는데, 이 영화에선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영화는 가슴에 많이 남았다. 사실적이면서도 시대를 고발하거나 과거의 문제를 재조명하지도 않았다. 그저 과거를 기억했고, 따뜻하게 담아냈다. 그리고 그 따뜻함은 대단한 감동이나 큰 애정과 희생이 아니라, 개인에게 특별한 개인적인 사건들과 개인들의 작은 희생과 애정일 뿐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이런 영화가 진짜 영화가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조금 지루하고 밋밋한 것 같지만 뭔가 진짜를 본 것 같은 느낌. 그렇다고 진짜 진짜인 다큐를 보는 불편함과 슬픔이 아니라 진짜를 느낀 그 진짜 느낌을 담은 진짜. 그래서인지 영화의 스타일을 결정하는 컬러와 분위기를 만드는 배경 음악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의 자전적 이야기를 큰 사건이 없어도 오밀조밀 담아낼 수 있는 알폰소 쿠아론이 부러웠다. 거장이니까 더 자유로웠겠지. 이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측면에서도 진짜 영화인 게 아닌가 싶고.

아무튼 이렇게 별 생각 다 들게 하는 점에서 영화적 재미와 의미 이런 걸 넘어서 최고의 점수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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