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링스 Sep 15. 2019

너만의 세상에서 나오라는  폭력적인 세상

프랭크 (2014)

‘은둔한 음악 천재 프랭크와 그에게 빠져 그를 대중화하려다 망친 평범한 존의 이야기’ 같지만 사실 프랭크는 천재가 아니다. 영화가 이 밴드를 집중 조명해서 우리도 그가 천재라고 믿게 된 거지만 그들의 영상을 보고 팬이 된 이들은 음악인이 아닌 그저 괴짜 집단, 재밌는 사람들로 생각할 뿐이다. 존이 트위터로 그들은 알렸지만 그들의 음악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또 프랭크는 소론프로프브스 멤버들에겐 천재다. 그들을 살아가게 하고 하나로 엮어준다. 그런 작은 그룹의 천재에게 빠진 안목 없는 인간이 작은 세상의 천재를 큰 세상으로 데려가다 생긴 비극이다.


리뷰들을 보면 평범한 존이 자신의 음악적 성공을 위해 프랭크를 이용하고 욕망을 투영하다가 밴드를 망쳤다고 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모짜르트와 살리에르에 비교하기도 했지만 나는 이건 우리의 관점에 대한 영화로 생각했다. 소론프로프브스는 남들은 잘 읽지도 못하는 밴드명을 사용하고 남들은 못 보게 가면 속에만 사는 리더를 숭배한다. 철저하게 남들과 거리를 둔 채, 보편적이지 않게 행동하고 살아간다. 동영상 조회수 숫자를 이해하지도 못해 기호처럼 읽거나, 스튜가 뭔지도 몰라 물어본다. 쉽게 보면 정신병자, 사회 부적응자이다. 문제는 우연히 합류한 존은 기본이 정상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한다. 비정상인을 보면 정상으로 만들고 싶은 게 정상인의 관점이다. 그게 영화를 지배적으로 보는 존의 관점이다. 비정상의 재능 중에 정상인들이 좋아할 잠재력이 있으면 그를 이용하려 한다. 하지만 대부분 착각이다. 비정상이 비정상인 건 그들이 비정상이기 때문이다. 서양인의 인디언에 대한 관점, 오리엔탈리즘과 동일하다. 그래서 그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순간인 축제 장소에서부터 영화는 불편하다. 성공(대중화, 모든 사란이 좋아할거야)이라는 이름의 폭력적 오리엔탈리즘이다.


좋은 집에 사는 잘 생긴 프랭크가 가면을 쓰고 집을 나가기 전까지 그의 부모는 좋은 가정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이유 없이 프랭크가 변했다며 슬퍼한다. 하지만 프랭크에게도 그랬을까? 그에겐 좋지 않았고 그래서 가면 속 세상에서 멤버들은 만났다. 자신이 구축한 세상인 가면이 깨어지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존재의 의미는 사라진다. 결국 더럽고 누추한 술집에서 만난 멤버들 사이에서, 그동안 공존했던 정상인 존이 잊혀진 순간에 프랭크는 부활한다. 그때 그가 흘린 눈물은 더 이상 해석하지 말자. 비정상을 비정상으로 두어야 할 것 같다.


위에서 말하는 비정상은 나쁘다는 가치 판단한 것은 아니다. 인식상 비보편적인 것을 말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살아간다는 것의 영화적 정의, 정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