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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링스 Aug 31. 2019

절제와 본능 사이, 꿋꿋하게 나아가기

<다가오는 것들>

고등학교 교사 나탈리는 어느 것도 욕망하지 않고 철학을 가르치는 것에 지적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다. 가족들도 문제없었고, 가끔 호들갑 떠는 혼자 사는 엄마만이 작은 골칫거리였다.


그런데 세상은 나탈리를 흔들었다. 책이 안 팔린다며 조잡해 보이는 책 표지로 개정할 것을 제안하는 마케팅 팀, 수업을 보이콧하며 데모하는 학생들,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난 남편, 점점 딸에 대해 의존 증세가 심해지는 엄마. 잘못 하나 한 것 없는 나탈리의 인생은 위태로워진다.


그래도 그중 하나의 희망은 옛 제자이자, 진보적인 작가로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 파비앵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의 유일한 만족인 사유와 철학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파비앵이 지내는 산속 작가 집단 모임으로 간다.


나탈리를 괴롭히거나 성가시게 군 마케팅팀과 남편, 그리고 엄마는 본능적이다. 이론적인 판단이나 지적인 절제 등은 없다. 그런 것들이 자신의 인생을 망친다고 생각한 나탈리는 그래서 지적인 철학이 남아있는 것을 찾아 헤맨다. 학교 제자들을 집으로 초대하고, 그들이 만드는 철학 웹사이트에 기고자로 흔쾌히 참여한다. 또한 파비앵이 지내는 산속으로 간다.


그런데 산속에서 경험한 것은 철저한 본능의 세계지, 지성은 없었다. 젊음의 혈기로 가득한 진보적인 작가들과는 대회도 하지 못했고, 엄마가 입원하며 남겨둔 고양이는 산속에 오자마자 숲으로 가버린다. 믿었던 파비앵 마저도 동료 여자 작가와 연인으로서 시간을 보낸다. 결국 인생은 본능을 회피할 수 없다. 숲으로 도망갔던 고양이가 다음 날 쥐를 물고 돌아오자, 결국은 본능이라 말하는 파비앵의 대사는 이 영화의 핵심이다.


영화는 이 순간 이후 묘하게 나탈리의 심리를 드러낸다. 계곡에서 파비앵이 다른 여자와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장면 바로 직후에 슬픔에 오열하는 나탈리를 잡는다. 물론 남편의 외도나 엄마의 죽음 등 슬퍼할 일은 많지만 묘하게 나탈리가 파비앵에게 연정을 품고 그것이 좌절된 듯하게 드러낸다.


결국은 나탈리는 자신은 본능을 추구해도 가질 수 없기에 본능 없는 사유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철학 수업에서 정신적인 사랑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장면은 그래서 측은하기까지 했다.


그런 나탈리도 엄마의 죽음 이후 고양이를 파비앵에게 보내러 다기 찾은 숲 속에서, 본능을 넌지시 내비친다. 마리화나를 피워보고 속이 안 좋다며 파비앵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다가간다. 무언가 스스로 꽁꽁 묶여있던 철학교사로서의 지적 나탈리가 조금은 인간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나탈리는 본능만을 향해 내딛지는 않는다. 그저 조금은 묶였던 사슬을 풀었을 뿐. 파비앵에게 족쇄와도 같았던 엄마의 상징인 고양이를 보내고, 딸의 출산 때 만난 남편에게 냉정하게 쏘아붙인다. 그리고 다시 교단에 나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 묵직한 모습이야말로 이 영화 역시 우리에게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아닐까.


자신의 위해서 아주 조금 변해가는 나탈리를 보며 인간의 성장은 나이와 상관없이 반복되는 것임을 다시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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