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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링스 Sep 17. 2019

외로운 사람, 차가운 사랑

렛 미 인|2018|토마스 알프레드슨

스웨덴 소설 원작의 탐미적인 공포영화로 독보적인 감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많은 영화들이 시간이 지나면 이야기나 장면들이 잊혀지는 반면 이 영화는 특유의 그 서늘하고 차가운 이미지와 이야기가 잘 잊혀지지 않는다.  하얀 설원, 가녀린 흰 피부와 흰 머릿결의 오스칼, 기교 없이 맑은 영상만으로도 영화는 기억에 남을 법하지만 그 위로 떨어지는 붉은 피, 처절한 뱀파이어 소녀 이엘리, 침묵 속 잔인함으로 이미지가 강하게 각인된다.


가만히 보다 보면 슬프지만 순수한 사랑 이야기처럼 보이다가도, 살아 남기 위한 뱀파이어의 냉혹한 숙주 길들이기로 보이기도 한다. 보는 사람에 따라 어디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감상이 달라진다. 왕따로 외로워하던 소년 오스칼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엘리를 만나 희생을 배우고 사랑을 배워 세상으로 나가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피에 굶주린 뱀파이어 소녀 이엘리가 기존의 숙주의 무능력으로 생존의 위기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을 숙주로 만드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순히 오스칼이 사랑을 배운 것이거나 또는 이엘리에게 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엘리의 의도는 베일에 싸여 있지만, 적어도 주인공인 오스칼은 이엘리의 존재를 통해 성장해 나가고 그리고 이엘리를 선택한다. 엔딩 이후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영화가 시작했을 때의 연약한 오스칼이 아닐 것은 분명하다. 결국 이 영화는 연약한 한 소년의 성장 이야기다.


오스칼은 처음에 나무를 칼로 찌르던 것에서, 괴롭히던 친구를 막대기로 쳐버리고, 마지막에는 이엘리를 죽이려는 남자를 찌르기 직전까지 간다. 한 단계씩 이엘리를 알아가면서, 한 단계씩 이엘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혹은 이엘리처럼 되어간다). 특히 조용한 설원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학생을 막대기로 때려눕힐 때, 이엘리의 아빠에게 살해된 시체가 발견되는 것이 교차편집으로 연출된다. 이는 마치 오스칼이 죽인 시체처럼 묘사되는데, 이엘리를 지키지 못하고 자살한 아빠를 오스칼이 대체할 것이라는 결말에 대한 기막힌 묘사이다.


오스칼이 레벨업했습니다.

중간중간 너무나 차갑고 냉혹한 뱀파이어로서 이엘리의 행동이나 수백 년 넘게 지속되어온 뱀파이어인 실제 얼굴이 잠깐씩 드러나는 장면들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이엘리와 어디론가 떠나는 오스칼의 모습이 불안해 보인 게 사실이다. 이엘리를 지키다 결국 이엘리에게 버림받은 아빠가 오스칼의 미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그러나 영화 내내 시선을 사로잡는 차갑지만 아름다운 설경, 그 속에서 너무나 고독하게 살아온 오스칼과 이엘리의 얼어붙은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을 조금씩 녹이는 둘의 어설프고 차가운 사랑을 보고 나면 비록 그들의 운명이 이엘리의 이해관계에 의해 엮여있다 해도 아름답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오스칼의 성장이 비록 밝지 못하고 흑화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잘 살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엔딩의 수영장 장면은 이런 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너무나 잔혹하고 슬픈 순간이지만, 너무나 정적이고 또 아름다운 그 순간, 잔혹함을 응원하게 하는 오스칼과 이엘리의 비정상적인 사랑.


이 영화는 공포영화로 분류될지언정 나는 성장영화로 소개할 것이고, 사실은 황순원의 소나기에 버금가는 청춘영화, 사랑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추천할 것이다. 너무나 외로운 사람들의 차가운 사랑 이야기.


"빛이 사라지면 너에게 갈게"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에 아직 두려운 오스칼에게 이엘리가 던진 차가운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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