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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의 성장이 어떻게 사회를 한 단계 진보시키는지 보여주는 듯 하나, 사실은 개인의 생존을 위해 어떻게 사회의 성장을 이용하는지 보여주는 영화로 느껴졌다. 개인의 생존이 개인의 성장일 수는 있으나, 그 성장이 사회를 위한 것, 혹은 그런 인식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개인은 그저 자기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였고, 그것이 기득권의 이권을 위한 보수적 선택이 아니었기에 자신을 위한 선택이 기폭제가 되어 진보적으로 사회를 변화시켰다.
캐서린의 선택은 언론인으로서의 직업정신, 시대의 정의구현, 철저한 현실인식에 따른 선택이라 보긴 어렵다. 오히려 위태로워지는 자신의 위치, 특히 물려받은 권한과 지위에 비해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인정받지 못하는 억압이 기폭제가 되었다. 그 억압도 거시적인 것이 아닌 자기 회사의 이사들이라는 자신의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아주 개별적인 관계과 사건에 의한 것이다.
캐서린이 그렇게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런 위태로운 캐서린의 위치를 이용한 편집국장 벤이 있다. 벤도 시작은 어떻게든 뉴욕타임즈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명예를 위해 불법 취재도 감행하겠다는 욕망의 의지가 강했다. 그리고 그의 앞에 펜타곤 페이퍼가 등장했다. 그리고 자신의 적인 사내 이사들의 회유로부터 캐서린을 설득하기 위해 언론의 자유, 저널리즘의 본분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진짜는 댄이다. 댄이야 말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진실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런 댄을 일으켜 세워준 것은 뉴욕타임즈였으며, 그런 상황에서 궁지에 몰린 캐서린과 벤은 자신들의 위기를 타개할 것으로 댄의 상황을 적극 이용한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초점이 정말 제대로 된 것인지 모르겠다. 시대적 약자이던 여성의 성장이라는 점에서 좋은 관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닉슨과 이전의 미국 정부의 부정부패에 대한 고발을 다루는 저널리즘에 대한 영화라고 하기엔 위협과 생존은 부족했고 상류층의 이권다툼이 중심에 있었다. 정말 삶을 걸고 고생을 하며 진실을 탐구한 기자들에 대한 스포트라이트는 부족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렇기에 너무나 현실적인 영화다. 댄과 같은 사람은 100명이 등장해도 아무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다. 권한과 지위를 가진 사람이나 기관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득권이기에 보수적이다. 희망이 있다면 기득권 간의 세력다툼이고 거기서 판을 뒤집기 위한 비책으로 진실이 쓰일 수 있다는 점이다.
진실이라는 이름 아래에 뭉쳤지만, 캐서린은 확고한 자신의 권위 확립, 벤은 뉴욕타임즈에 버금가는 신문사로의 성장을 얻어냈다. 순수한 진실의 승리자는 댄이지만 결국 사회를 변화시킨 건 캐서린과 벤의 용기와 선택이며, 그것이 가능한 것은 생존에 대한 절실함이었다. 캐서린이 남자였고 회장의 위치가 위태롭지 않았다면, 벤에게 뉴욕타임즈라는 스트레스 주는 경쟁상대가 없었다면, 개인의 생존에 위기가 없었다면 진실의 등장도 없었을지 모른다. 진실을 위해 생존을 담보한 댄과 비교하 보면 현실의 알고리즘은 참 아이러니하다.
현실은 순수한 의도보다 실제로 이루어내는 것이 중요하고, 이루어 낸 자는 승리자가 된다. 이루어 낸다면 여러 불순한 것은 희미해지고 명료한 진실에 대한 명분이 남는다. 그리고 이런 명분은 또 다른 이들에게 희망과 나침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