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2015|윤가은
좋아하는 단편 영화 중에 <손님> 이라는 작품이 있다. 아빠를 뺏어간 불륜녀의 집으로 쳐들어가는 고등학생의 이야기인데, 불륜녀의 집에 불륜녀는 없고 어린 남매만이 있다. 그리고 하염없이 불륜녀를 기다리며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게 되는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기가막힌 소품의 활용과 어른 아이들에 대한 심리의 이해도에 탄복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기억했다. 윤가은.
그래서 <우리들>은 기대되는 작품이었다. 오프닝부터 강렬했다. 일상적인 자연광 아래 아이들의 일상 소음으로 가득찬 몇 분이지만, 그 속에서 묘사되는 주인공의 감정은 너무나 적나라하게도 너무나 공감되었고 그리고 그걸 표현해내는 배우에 대한 놀라움으로 시작했다. 밝고 아름다운 햇살아래 표현되는 영화의 색감, 정갈한 선이의 얼굴, 까르르 거리는 아이들의 밝음, 그 속에 묘하게 긴장을 이렇게도 묘사해내는 표현력에 감탄했다.
그러나 사실 이야기의 전개는 중후반까지 좀 평이했다. 이야기는 크게 두 파트로 나눠지는데, 먼저 방학을 맞이해 우연히 알게 된 예비전학생 지아와 친해지는 전반부와, 개학을 하게 되며 배경이 달랐던 두 친구가 점점 멀어지고 보라라는 제 3의 인물이 등장해 갈등이 극대화되는 후반부. 이 두 파트 모두 사실 전개 자체는 신선하거나 새롭다기보다는 조금은 평범하다. 어디서 볼 법한 전개와 갈등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들은 정말 치밀하게 잘 구성되어 있다. 하나 버릴 대사와 소품이 없다. 다 나중에 쓰여질 재료들로, 인물들의 갈등 구조와 각자의 배경에 대한 설정들이 기가막히게 서로 엮어서 전체의 큰 이야기의 부품들이 되어있다.
너무 잘 짜여져 있어서 인가? 조금 반감이 들기도 했다. 선이가 가까워지고 싶어지지만 두렵기도 한 지아라는 캐릭터를 잘 나타내는 사건인 문방구 색연필 도난도 나중에 갈등의 소재로 잘 활용되고, 둘의 배경이 다르고 멀어지는 요소로 등장하는 영어학원도 갈등의 소재로 기가막히게 사용된다. 이런 구조의 무결함 때문에 의외성이 없어지다보니 영화가 오히려 평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보게되었다. 필요한 장면에 계속 필요한 인물이 등장하는 게 사실 좀 많긴하다. 갑자기 술에 취해 아빠가 불러내는 날 지아를 만나고, 영어학원에 다니는 여러 인물이 있지만 유독 선이가 간 날 보라가 혼자 울고 있고. 이런 것들이 주는 약간의 피로감이 있다.
그러다보니 앞으로의 전개도 조금 예상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관건은 과연 갈등을 얼마나 더 심화시킬 것인가? 얼마나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줄 것인가? 그리고 결국 어느 지점에서 아이들을, 특히 선이를 성장시킬 것인가를 추측하는 잡생각으로 머리만 복잡해지고 있었다. 지아와의 어떤 계기일까? 스스로 깨닫게 될까? 부모님이나 학교의 역할이 나올까? 그러나 이런 모든 생각은 틀렸고, 의외의 곳에서 핵펀치가 나와 이선 모두에게 날아왔다.
핵펀치의 주인공은 윤. 영화 내내 선이의 주변에서 사고뭉치지만 귀염둥이로 그저 감초라고 생각했던 윤의 한 마디가 나의 모든 생각들을 벙찌게 만들었고 나는 한 동안 그 여운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누나인 선이의 머리 속도 강하게 내리쳤고 선이도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이 한 마디는 선이를 성장하게 되는 기폭제가 되었고, 영화는 끝을 모르게 얽혀 관객에게 속이 터지는 답답함을 한 번에 해결해주는 사이다가 된다. "그럼 언제 놀아?"
이 감독은 정말 아이들의 심리에는 통달한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어른이 저런 생각을 해내고 대사를 썼을까. 너무나 복잡하게 꼬인 어른 중의 어른인 내 머릿속은 이 얘기로 눈물이 핑돌며 뇌정지가 와버렸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연출이다. 결국 선이의 고민의 해답은 가장 순수하고 단순한, 그러나 또 가장 진솔한 마음에 가까운 동생에게 있었다.
이 영화가 너무 완벽하게 잘 짜여있어서 반대로 어느 정도 지루함이 있었다고는 했으나, 또 하나 정말 감탄할 만한 것은 소품의 활용이다. 단편영화 <손님>에서도 가장 감탄했던 것은 엔딩 장면에서 등장하는 레고 부품이다. 내용을 다 말할 순 없지만, 불륜녀를 찾아갔다 애꿎은 불륜녀의 어린 남매들하고 시간만 보내고 온 주인공이 그 집을 나서는 장면인데, 발이 아파 신발을 벗어보니 신발 속에 남자 꼬마가 가지고 놀던 레고 부품이 하나 들어가 있다. 이 하나의 장면으로 주인공과 어른 아이들 간에 알 수 없는 동질감과 유대감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대사 하나 없이, 불필요한 묘사하나 없이 기가 막히게 드러내는 것을 보고 천재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것이 이 영화에서는 "손톱"으로 드러난다.
영화에서 손톱은 크게 두 개의 큰 상징과 연결된다. 첫 번째는 지아와 함께 물들인 봉숭아, 두 번째는 보라에게 비밀을 터놓고 얻게 된 보라색 매니큐어다. 이 두 장치에 아주 세밀한 연출들이 깨알같이 들어 있다. 봉숭아는 말그대로 자연이다. 스스로 성장해온 꽃이며 그래서 진심과 살아있는 감정이 담겨있다. 선이가 지아에게 제안한 봉숭아 물들이기는 그런 지아의 설렘을 담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봉수아를 물들이는 장면은 아래처럼 꽁꽁 감춰진 설렘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둠 속에서 지아는 봉숭아로 싸매진 손톱을 보며 자신의 비밀을 조금씩 선에게 내비친다.
반대로 보라의 매니큐어는 만들어진 것이고 공산품으로 복제가 가능하다. 그래서 그것은 지아에게로 갔다가 선이에게로 가는 것이 너무나 쉽다. 그래서인가? 세상을 통달한 윤이는 보라의 보라색 매뉴큐어를 한 번 발라보더니 집어던져 망쳐버린다. 그렇게 관계를 상징하는 매니큐어가 망가졌을 때, 보라는 그저 쉽게 버리라고 말한다.
그렇게 보라색 손톱을 가지게 된 선은, 여전히 분홍색 손톱(과 분홍색 팔찌)을 가진 지아를 대면한다. 이렇게 엇갈인 둘은 여기서 갈등이 폭발하고 그들의 전쟁은 끝을 모르고 달려가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사실 그렇게 대면한 장면에서 선이가 보라의 보라색 매니큐어를 지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쳐 지워내지 못한 상황에서 대면한 지아와의 대면에서, 선이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어설픈 화법으로 관계를 어그러 뜨린다. 그리고 이어진 장면에서 봉숭아 물과 보라색 매니큐어 두 개가 섞여져 엉망이된 선이의 손은 정말 엉망이 되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선이의 마음을 대변한다.
이 이후 몇 번의 충돌이 더 있었지만 선이는 다시 팔찌는 만들며 지아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이때 손톱은 보라색은 사라졌으며 봉숭아 물은 아주 조금, 희마하게 남아있다. 마지막 선이의 희망같은 그 작은 마음. 하지만 그 마음을 미처 전달하기도 전에 이미 상처입은 지아의 반격에 지아의 마음은 뜨거운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그 상처로 인해 아빠에게 반항하며 손에도 생채기가 생긴다. 밴드를 감아보지만 그 상처는 밴드를 뚫고 나온다. 상처를 어루만지는 손에 남은 작은 봉숭아가 애처로워 보인다.
그렇게 다친 손톱은 지아와의 말그대로 혈투와 할머니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폭풍우를 지나 조금 더 자라난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윤이의 핵폭탄급 말을 듣고 선이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깨끗했던 그 상태로. 물론 상처와 앙금은 남아 여전히 거칠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귀신같이 이 말 그대로의 손톱을 영화는 제시하며 결말로 향한다. 약간은 지저분하지만 그래도 말끔이 비워진 손톱(물론 아주 작은 봉숭아는 하나의 힌트이겠지만). 계속된 관계로서 아닌, 다시 처음부터 시작되는 관계로서 지아를 맞이하겠다는 선이는 자신이 처했던 상황 속에 그대로 처한 지아에게 다가서며,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며 끝난다. 그렇다. 얼마나 다치고 때 묻었든, 손톱은 늘 다시 자란다.
지독하리만치 영화의 소재를 활용하는 것이 하나의 스타일로 느껴진다. 그리고 이렇게 손톱만 모아보니 정말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사실 영화를 볼 때는 이런 장면들이 하나도 부자연스럽지 않게 등장한다. 그만큼 손톱이 대변하는 선이의 감정은 자연스러웠고, 이 장면들도 손톱보다는 그걸 바라보는 선이의 마음의 표현으로 쉽게 넘어간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시나리오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영화를 만들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런 세심하고 디테일한 연출들이 감독을 명장으로 만들고 작가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선 유독 여성 감독이 지속적으로 힘들 발휘하지 못했다. 독특함으로 잠시 주목을 받았거나 혹은 더 유명한 남자 감독과의 연계점으로 등장했던 것들이다. 하지만 윤가은 감독은 아주 서서히 혼자의 힘으로 자기의 세력을 만들어 가고 있고, 자극과 독특함이 아닌 일상과 자연스러움을 무기로 파고들고 있기에 아주 오랜 기간 자기만의 영역을 확보해나가며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넘어선 아이들의 감독이 되기를 기대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