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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 May 05. 2020

07 그해 여름, 평온했던 수영의 기억

물고기가 되고 싶었다

7월엔 수영을 시작했다. 지금으로선 꿈도  꾸지만, 그땐 아직 전신피로감이 지금만큼 심하진 않았다. 피로감이 나를 온통 잠식해버리기 전이었거나, 아프기  운동으로 쌓아놓았던 체력으로 버텼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지금이라면 수영장에 가서 수영복을 갈아입다가 이미 지쳐버릴 것이다.) 나는 아프기 전에도 계속 운동을 했었고, 목이 아프기 시작한 이후 운동을 하지 못해 체력이 떨어져 가는 것과 군살이 붙어가는 것이 걱정되던 참이었다. 아파서 운동을 못하고, 운동을 못해서 체력이 떨어지는 악순환을 피하기 위해 통증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어떻게든 뭐라도 해볼 궁리를 했다.


4월 초에 이전에 같이 운동했던 트레이너 선생님에게 가서 PT레슨을 등록했지만, 4월과 5월을 통증과 가려움증으로 날려버린 상태였다. 6월이 되어 상태가 조금 나아지자 PT를 시작했지만, 퇴근 후 헬스장에 가는 걸음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정말 가기 싫었다. 학교 근무만으로 체력이 이미 방전되어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고, 운동을 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하루 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몇 년을 해도 그 운동은 어찌나 지겹고 재미가 없는지. 그렇지 않아도 인생에 재미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던 ‘인생 노잼 시기’를 지나고 있던 나에게 그런 쇳덩이들이 마음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퇴근 후에 또 다른 시간 약속이 있는 것도 부담이었다. 나는 어딘가에 시간을 맞춰 가는 것에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다. 하루 종일 분 단위로 시간을 지키며 살아서 그런가 싶었다. 그럼 그냥 집에서 편하게 쉬면 좋겠지만 운동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 건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해도 스트레스, 안 하면 안 해서 스트레스,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      


그때 생각해낸 것이 수영이었다. 퇴근 후에 다시 나가지 않아도 되고, 어차피 출근 때문에 일어날 거 조금 더 일찍 일어나는 것뿐이니 추가적인 약속의 부담도 없었다. 그리고 씻은 김에 바로 학교에도 갈 수 있었고, 운명인 듯 출근하는 경로에 수영장이 한 곳 있었다. 가장 하기 싫은 일을 가장 먼저 하면 모든 게 심플해질 것 같았다.  


운동 종목 변경 고민 중/운동에 관하여는 오빠에게 물어보는 편이 좋다

   

고민은 길어도 결정은 빠르다. 느낌이 오면 바로 직진하는 편이다. (결혼도 그렇게 했다.) 결정 후 다음 날 수영복을 사고 그다음 날 수영장에 가서 바로 등록을 했다. 그렇게 물에 한번 떠본 적도 없던 내가 아침 7시 수영을 시작하게 됐다.      



수영은 좋았다. 내가 어떤 운동을 ‘좋다’라고 표현한 것은 내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영은 즐거웠고 재밌었으며, 심지어 종종 행복하기도 했다. 행복 같은 뭉뜬 단어를 일기장에도 별로 써본 적이 없는 내가 물속에선 종종 행복하다고 느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수면의 시작, 수면의 지속 모두가 별로 좋지 않다. 그 당시에도 수면의 지속이 좋지 않아 새벽에 일찍 깨곤 했는데, 그땐 일찍 깨면 그냥 수영장에 가버렸다. 아무리 졸려도 수영장에 가서 물에 들어가면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물속에서는 몸이 한결 가벼워진다. 우루사 곰처럼 어깨 위에 무겁게 앉아있던 피로감도 느껴지지 않고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 중력이 덜어진 부력의 세계에서 나는 가벼운 새가 된 것만 같았다.


특히 난 물에 둥둥 떠 있는 상태를 좋아했다. 배영으로 떠있거나, 물에 들어가 발차기나 스트로크는 하지 않은 채 ‘음-’ 상태로 떠 있는 것. 그 상태가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그것이 너무 좋아서 나는 물고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고기가 된다면,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물 바깥으로 내밀지 않아도 되니까. 하루 종일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물속에만 있을 수 있으니까.      


2018년 7월 13일 수영 일기 중


날마다 블로그에 수영 일기도 썼다. 강습이 없는 날에도 수영장에 가서 자발적으로 연습을 했다. 한 달쯤 지나선 같은 반 언니들에게 ‘아유 진짜 잘해!’ ‘수영 신동이야’ 같은 칭찬을 듣기도 했다. 초급반에서 오가는 듣기 좋은 칭찬인 것을 알지만 나는 그런 말 한마디면 신이 나서 물속을 더 오랫동안 춤추듯 날아다니곤 했다.  

   

당시 열심히 쓰던 수영일기


아침 수영을 시작한 이후엔 일하는 것도 즐거워졌다. 그 시기에도 통증은 여전히 나와 함께였고,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잠들기 전까지 온몸이 아프고 항상 절인 배추처럼 피곤한 상태였지만 물속에서만큼은 아프지 않을 수 있었다. 그 틀림없는 한 시간으로 하루를 버텼다. 그리고 수영장에서는 사람들과 웃으면서 대화도 할 수 있었다. 몸이 아픈 것을 참고 숨기면서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되었다. 물속에선 실제로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수영장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나는 밝고 유머가 많은 활달한 물개였다. 당시 나와 같이 일을 했던 사람들은 의아해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나의 가장 자연스러운 원래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 같은 말을 입에 올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은 단연코 수영을 시작한 것이라고 일기장과 블로그에 꾹꾹 눌러 적었다. 수영을 시작한 것은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나는 행복한 물고기가 될 거야     



하지만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유형 호흡을 한쪽으로 하다 보니 오른쪽 목 통증이 2월의 최악의 시기처럼 심해졌고, 양팔 스트로크 자세 때문에 등 한가운데 작열감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수영을 하고 나면 등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어 쿨링 젤을 자주 발랐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물에 자주 접촉하면서 가려움증이 다시 심해졌다. (평영을 시작하며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한 것도 10%쯤 기여했다.) 피부과를 다니며 증상을 조절했지만 통증과 작열감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결국 9월 초 수영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나는 수영장에 돌아갈 기회만 호시탐탐 노렸다. 체력이 조금이라도 괜찮아지면, 어떤 운동을 시도하게 된다면 그것은 무조건 수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작년에만 3개의 수영복을 샀다. 다시 수영을 하고 싶어 새 수영복을 사고, 시간이 지나 또 그때 맞는 사이즈의 수영복을 사다 보니 서로 다른 사이즈의 수영복만 여러 벌 갖게 된 것이다. 작년에 수영장에 간 것은 자유 수영 단 한 번뿐이었지만(그것마저도 갔다 와서 이틀을 앓아누웠다) 나는 그렇게도 수영장에 돌아가고 싶었다. 통증과 중력이 없는 부력의 세계. 그곳이 그리웠다.          



아직도 수영장 가방은 방 한편에 그대로 놓여있다.

그 가방 하나면 언제고 출발할 수 있다. 나의 엔진이 다시 켜진다면.


언젠간 꼭.

                




※ 후에 섬유근육통 환자의 운동 개입에 관한 논문을 읽어 보니 섬유근육통 환자에게 고강도 반복 운동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수영은 근육 신장성 eccentric 스트로크가 대부분인 집중적인 상체운동이기 때문에 고강도로 수행될 경우 돌발통을 유발할 수도 있기에 유의해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Kim D. Jones, Ginevra L. Liptan, 2009. Exercise Interventions in Fibromyalgia:Clinical Applications from the E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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