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은 수용성이라더니 글이 잘 풀리지 않고 속이 답답한 날, 목욕탕에 다녀왔다. 집에서도 샤워는 할 수 있지만 그걸로는 왠지 부족하다. 물이 한가득 담겨있는 탕에 몸을 담그고 싶은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우리 동네엔 우울한 사람들이 많지 않은지 목욕탕에는 평일보다 약간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뿐 주말이라고 사람이 넘쳐나거나 하진 않았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나 말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는데 이렇게 날 좋은 봄날 오후엔 목욕탕 보단 나들이를 가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일반 젊은이의 틀은 벗어나네.라고 혼자서 속으로만 중얼거려 보았다.
목욕탕에 도착하면 일단 자리를 선점해야 한다. 각자의 소지품이 엉켜있는 사이 빈자리가 어디인지 빠르게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중에서 내가 이동하기에 가장 편한 곳에 자리 잡으면 끝. 바가지에 물을 담아 때수건을 넣어놓고 내 목욕가방을 옆에 세팅하면 그 자리가 내 자리라는 표식이다. 자리를 잡으면 물을 틀어 온도를 맞춰보고(하지만 모두가 적정온도를 사용하기에 맞출 필요가 없다) 자리를 물로 씻어본다. 쓱쓱
그러고 나서 나는 샴푸와 바디워시를 들고 서서 씻을 수 있는 곳으로 향한다. 이건 내가 목욕탕에서 좋아하는 포인트 중 하나인데 꼭 내 자리에서만 씻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언제든 지나가다가 샤워기로 씻을 수 있다는 것이 자유롭게 여겨진다. 그렇게 탕에 들어가기 전 준비를 마치고 머리를 동여매고 41도 탕에 살포시 들어가 앉는다.
탕에 들어갈 땐 3단계로 진입한다. 입구에 걸터앉고, 탕 안 의자에 앉고, 마지막으론 바닥에 앉는다. 처음엔 뜨거워서 어떻게 들어가나 싶지만 사람은 어찌나 적응의 동물인지 조금씩 조금씩 익숙하게 만들다 보면 어느새 바닥에까지 앉을 수 있다. 그때부턴 그냥 물멍의 시간이다. 멍. 오늘은 멍 때리며 옆을 보다가 옆 탕에서 본격적으로 수경까지 쓰고 수영을 하는 여섯 살(다른 손님과 대화하는 것으로 정보를 파악함) 꼬마를 발견하곤 ‘너 목욕탕에서 그러면 안 돼’하는 듯한 눈빛으로 한동안 그 아일 응시했다. 아이는 계속 헤엄치다가 눈치가 보였는지 얼마 후 멈추긴 했는데 생각해 보니 ‘나도 수영이 하고 싶은데 너라고 오죽하겠니’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어른도 사람만 없으면 여기서 수영하고 싶은데 내가 좀 쳐다봤다고 수영을 멈추다니 대견하구나 짜식. 하고. 근데 수경까지 쓰고 온 건 너무 본격적인 거 아니니?
온탕은 오래 있기엔 적합하지 않다. 숨이 막히기 때문이다. 길어봤자 한 번에 십분 정도 있다가 나와서 물을 한 번 마시고, 그다음엔 또 다른 탕에 들어가 본다. 우리 동네 목욕탕엔 누워서 물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탕이 있는데 그 탕도 내가 좋아하는 포인트 중 하나다. 처음엔 작동법을 몰라 그냥 누워만 있었는데 어느 날 오른쪽 위에 있는 빨간 버튼을 눌러보니 어깨허리 발 부위에 물이 따발총처럼 뽀글뽀글 마구 뿜어져 나왔다. 이건 이렇게 사용하는 거구나! 그 탕의 사용법을 알아내자 왠지 진정한 이 목욕탕의 일원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마사지를 받는 것은 기분이 뽀글뽀글하고 간질간질하고 좋다. 연속으로 두 번까지는 받을만하다.
목욕탕에서 제일 아쉬운 점은 이도저도 아닌 탕의 부재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의 탕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사람들이 다 수영하려고 들 테니 문제일 것 같긴 하다. 그리고 이도저도 아닌 탕이 목욕탕에 왜 필요하겠는가.
사람들이 냉탕에 마구 들어가 있는 모습은 여러 가지로 참 신기하다. 손만 대도 너무 차갑고 발만 넣어도 온몸이 시리기 때문이다. 어떻게 몸을 담글 수 있는 거지? 어렸을 땐 목욕탕에 가면 냉탕에 가서 놀려고만 했고 온탕은 뜨겁다고 싫어했었는데 이젠 반대가 되었다. 내가 나이를 먹고 있긴 하구나. 그런데 오늘 본 냉탕 속 사람들은 모두 선배님들이었다. 냉탕을 견디는 건 어떻게 가능한 걸까? 궁금하다.
물속에선 잘 풀리지 않는 글의 구절을 계속 떠올렸다. 물이 좋은 건, 어떤 종이도 기계도 장비도 들고 들어올 수 없어 세상과 잠시 떨어질 수 있다는 건데 나는 그 구절을 고민을 너무 많이 한 탓에 쓸데없이 다 외워버렸다.
그래서 물속에서도 계속 생각했다. 이게 낫나 저게 낫나, 그래도 눈앞에 두고 비교할 수는 없으니 현실과는 약간 떨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여섯 살 꼬마처럼 수경을 쓰고 수영을 할 순 없었지만 눈을 감고 머리를 물속에 처박곤 음—-파를 하며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탕과 샤워기 앞과 앉아 씻는 자리, 물과 물 사이를 오가다 보면 목욕탕에서 나가야 할 때가 온다. 그 시기는 그냥 알 수 있다. 뜨거운 수증기가 조금 답답하다고 느껴질 때쯤 몸을 한 번 시원하게 씻고 목욕탕에서 나오면 된다.
그리고 바디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말리며 생각한다. 물에 들어갔다 나오니 역시 기분이 좋아. 아무 생각도 없어서 기분이 좋아. 몸이 가벼워져서 기분이 좋아.
물에만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져서 날이 이렇게나 좋은데도 나는 물에 자꾸 들어간다. 어느 봄날, 나는 피크닉 가방 대신 목욕 가방을 들고 목욕탕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