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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 May 17. 2020

11 새 학기 스트레스와 통증의 재 악화

더 나빠질 수 있는 줄은 몰랐지

  2019년 1월 말쯤엔 심발타* 복용으로 통증이 미세하게나마 완화됐다. 나는 조금 나아진 틈을 타 새 학기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살을 빼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지만, 나는 아픈 와중에도 체중관리에 대한 끈을 놓지 못했다. 나는 아프기 전까진 규칙적인 운동과 간헐적인 식단 관리로 몸을 유지했고, 아파서 운동을 하지 못하니 체력이 떨어져 더 아프게 되는 것과 살이 찌는 것이 싫었다. 아픈 기간이 일 년쯤 되었으니 그동안 운동을 못한 것이 쌓인 데다가 결혼으로 남편과 함께 가을 겨울을 즐겁게 먹으며 보냈던 터라 짧은 새 군살이 많이 붙었다. 출근을 하려면, 출근을 위한 옷을 입기 위해선 살을 빼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등록해놓고 횟수가 남은 PT레슨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2월 안에 뺄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던 것 같다. 그것이 뭐가 그리 중요했을까.

*심발타 : 섬유근육통 약 중 하나     


2019년 1월 중순의 통증 기록과, 심발타 복용 후 통증그래프 (2019.1.30)

운동을 겨우 4번 했을 뿐인데 심발타를 먹기 전의 통증으로 돌아갔다. 그 차이가 그리 크진 않았다. 겨울 내내 통증이 심했던 것이 약 복용으로 아주 조금 나아졌을 뿐이었다. 여전히 통증이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있었지만, 어차피 아플 거라면 운동 후 근육통과 원래 가지고 있던 통증을 한꺼번에 견뎌보면 어떨까 싶었다. 통증을 그냥 참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지만, 운동을 하면 체력이 남을 테니 나름대로는 맞불작전을 쓴 것이다. 하지만 통증이 생긴 이후의 나에게 PT는 운동 강도가 너무 높았다. 파스를 붙이며 몇 번을 가다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하지만 4번의 PT가 통증의 재 악화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통증이 있음에도 굳이 PT를 하게 된 이유 속에 그 진짜 원인이 숨어 있었다.     



  새 학기가 다가온다는 것. 교사에게 3월은 일 년 중 그 어느 때보다 정신적, 신체적 스트레스 강도가 높은 달이다. 수업, 담임 학급, 동료, 업무 등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전쟁 같다. 눈과 귀를 평소보다 10배는 더 키운 채, 몇 배는 더 집중하고, 몇 배는 더 긴장한 채로 하루를 보내야 한다. 그 긴장감과 어색함의 공기. 학생일 때는 개학날을 가장 싫어했다. 그래도 그때는 그저 앉아서 1/35이면 됐는데 그것을 앞에서 진두지휘하는 입장이 되어보니 학생 때 느꼈던 새 학기 스트레스는 교사의 그것에 비하면 명함도 내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열 번을 반복해도 도무지 익숙해지거나 무뎌지지 않아서 나는 2월 내내 초조했다. 게다가 아픈 이후 처음으로 담임을 맡게 되는 것이기에 과연 내가 지금의 상태로 담임 업무를 할 수 있을지, 매주 두 번의 야간 자율학습을 버텨낼 수 있을지 두렵고 불안했다. 개학 스트레스의 크기는 평소와 비할 수 없이 커져갔다.     


심리적 스트레스와 더불어 수업 준비를 하며 노트북을 사용하고 책을 본 것이 통증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내 통증에 최악의 자세라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수업 준비를 하며 두 가지 행동을 하지 않는 방법은 없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작업을 하면, 목의 사방이 당기고 뻣뻣해져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그 이전까지 나의 통증은 목의 뒷부분이 주요했는데, 목의 앞부분까지 통증과 당김, 경직감이 생긴 것은 바로 그때쯤이었다. 하지만 준비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심장이 터질 듯 불안했고, 그렇다고 앉아서 수업 준비나 담임 학급 준비를 하면 등이 바스러지는 것 같았다. 파스, 쿨링 젤, 찜질팩, 마사지기를 모두 동원해 겨우 겨우 참고 작업을 하다가 누워 잠시 쉬고, 다시 일어나 작업을 하다 쉬길 반복했다. 몸과 마음 둘 다 어떻게 해도 편하지 않았다.     


마음의 스트레스는, 막상 학기가 시작되면 금세 나아질 것이고 3월만 버티면 4월부턴 훨씬 완화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몸의 통증은,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출구는 없는데 입구로 스트레스(정신적・신체적)만 끊임없이 들어와 몸이 터져나갈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툭하고 건드리면 펑하고 터져버릴 듯 한 폭발 직전의 풍선처럼 2월의 나는 위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멈췄으면 나았을까. 하지만 2018학년도를 끝내고 맥없이 쓰러지거나 장렬히 전사하지 않은 내가 2019학년도의 배를 타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섬유근육통은, 이놈의 통증은 지긋지긋하게도 나에게만 신호를 보내고 남들 눈에는 절대 보이지가 않아서 내가 아프다는 것을 타인에게 증명해 보여야만 한다. 일을 못 할 것 ‘같은’ 상태가 아니라 실제로 일을 못 할 상태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었을까. 몇 번을 다시 되돌아가 봐도 내가 2019학년도를 아예 시작하지 않는 방법은 없었다. 내가 한계치에 다다렀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직접 보여주어야 믿을 것이었기에.          


개학 전 기록



2018년 2월에 통증이 나에게 보냈던 신호가 ‘제발 중간만 였다면 작년, 2019년 2월의 통증은 무슨 의미였을까. 유 원장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통증이 내게 말하려 하는 건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2019년 2월 그렇게 크게 소리치던 통증은 제발 중간만 라고 말하고 있었을까. 하지만 그때 내게 중간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2018년처럼 중간쯤에 머무는 자리는 교직에 거의 존재하지 않고, 2019년의 나는 담임이 아니라면 과중한 업무 둘 중 하나 말고는 딱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러니 그것은 아니라고, 극단적으로 살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통증이 또다시 신호를 보내온 것일까.      


멈춰. 그거 아니야.  지금 그대로 가면 끝나.   

  

통증이 말하는 끝은 무엇이었을까. 정말 그놈은 내 몸에 유리한 방향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 맞았을까.  

    

느리게   없다면 내리게 하는 수밖에.     


2019년 2월에 또다시 악화된 통증은, 나에겐 그런 의미였을 거라고 밖에 생각하지 못하겠다. 특별히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살아남았기에 그저 줄 지은 행렬에 따라 2019년도의 배에 올라탔고 남들이 다 하는 만큼의 역할을 받았을 뿐이었다. 매일 같이 심해지는 배 멀미가 괴로웠고, 빼곡히 짜인 1년의 항해 일정이 내겐 버거워 보였지만 내릴 수가 없었다.      


2019호

이미 배는 출발한 뒤였다. 통증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지만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지금 와서 뭐 어쩌라고? 뒷수습은 어떻게 해?' 하지만 뒷수습보다 내가 그곳에서 남은 1년간 2018년의 고통을 똑같이, 혹은 더 극심하게 겪어야 한다는 것이 훨씬 두려웠다. 과연 나는 이 항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이제 막 출항한 배는 갈 길이 멀었고 나는 멀어지는 항구를 바라보며 마음이 심란했다.  



   


개학 전날의 기록. 통증이 심하여 글씨도 엉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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