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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 Jul 27. 2020

21 유산. 그리고 두통의 종결

임신이 종결되자 두통도 종결되었다

며칠 뒤 100이었던 두통의 강도가 80쯤이 되었다. 그다음 날인 8월 13일, 8주 차 검진일이라 산부인과에 갔다. 그날은 눈을 뜰 수 있었다. 두통 때문에 산부인과를 갔던 것이 늦은 저녁이라 그날 당직 원장님으로 진료를 보며 담당 원장님을 바꿨는데 그의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얼굴을 보며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초음파를 보더니 심장이 뛰지 않는다고 했다.


놀람의 말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바로 다음 날로 수술 날짜를 잡았다. 병원을 나와 바로 앞 카페에서 아무 말 없이 스무디를 마시다 남편에게 말했다.     


그래도 내 몸에서 뭔가가 죽기를 바라진 않았는데.  

  

그때 조금 울었다. 그 후로는 조금도 울지 않았다.     



소파수술은 빠르게 끝났다. 회복은 꽤 오래 걸렸다. 임신 출산 카페에 후기를 남기는 사람들이 별로 아프지 않다고 쓴 것은 너무 아팠던 사람은 후기를 쓸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후기를 쓸 여력이 없었다.     

학교의 여름방학 전날 임신을 알았고, 2학기 개학 날 소파수술을 했다. 날짜가 여러모로 묘했다.      


두통은 놀랍게도 유산을 알게 된 전날부터 줄어들어 한 달 동안 하강곡선을 그렸다. 임신을 위한 호르몬이 몸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데에는 그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고, 그러니 나는 그 두통이 임신 중 분비되는 어떠한 호르몬 때문이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임신을 하여 두통이 시작되었고, 임신이 종결되자 두통도 사라졌다.     



유산을 한 이후에도 난 오랫동안 화가 나 있었다. 두통이 있던 10일 사이 병원에서 겪은 일들은 절대 잊히지 않았다. 그 억울함과 막막함이 자꾸 떠올라 자주 울컥했다. 유산을 했다는 말에 나의 임신 사실을 알았던 사람들은 모두 위로의 말을 건넸다. 다음엔 더 건강한 아이가 찾아올 거라고.     


다음? 다음은 없다. 내가 병원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기나 해? 그게 어떤 두통이었는지 상상할 수나 있어?     


수술 후에 엄마가 올라왔다. 유산도 아이를 낳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다음번을 위해선 몸조리를 잘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또 다른 임신에 동의한 적이 없었다.     


두통이 끔찍했다.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은 최악의 통증이었다. 지금까지 겪어 온 모든 통증을 뛰어넘었다. 그래서 두통 때문에 그곳이 지옥이었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나는 임신부라는 이유로 적절한 의학적 조치를 받지 못한 채 철저히 배제된 경험 때문에 깊이 상처 받았다. 임신부이니 금지된 약물이 많고, 그 두통은 임신이 원인이라 임신 중단을 하고 싶은데 그것도 법으로 금지되었다. 빠져나갈 수 없는 지옥에 갇혀있는 기분이었다. 출구 없는 감옥이었다. 그것을 만든 것은 이 나라였다.     


‘그래, 우리 강아지 몸조리 잘하고, 다음엔 건강한 아기가 올 것이니까.’     

외할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다음. 다음. 다음.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난 이제 막 지옥에서 돌아왔고, 내 목숨을 구하게 되어 안도하고 있는데 왜 사람들은 나를 다시 그곳으로 보내려 하는 것일까.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데 선택을 강요받는 느낌이었다. 아니, 내가 아이를 꼭 낳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들의 말이 아무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아 딩크로 살고 싶은데 그런 결정을 단숨에 내리긴 힘들었다. 나는 이제 막 소파수술을 했고, 그런 생각은 나중으로 좀 미뤄두고 싶은데 주변 사람들의 말들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내 축을 더 단단히 해야 할 것 같았다. 틈만 나면 ‘딩크’라는 단어를 검색해 글을 읽었지만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기타를 칠 순 없었다. 아직 그런 체력은 회복되지 않았기에 휴대폰 음성 메모를 켜 노래를 녹음했다. 노래를 만들었다.      

행복도 있겠지
슬픔도 있겠지
그렇다고 이미 아는 아픔을 선택할 자신은 없어     

같지는 않겠지
변할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아는 아픔을 반복하고 싶진 않아     

후회도 하겠지
안 할 수도 있겠지
그 모든 걸 알 순 없는 난 그냥 멈춰 있고 싶어

2019.8.19.     

두통 때문에 매 순간 사투를 벌이며 임신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던 그때, 나는 만약에 몸속의 그것이 태어난다면 여자아이는 아니길 바랐다. 아이를 낳을지 말지를 두고 고민하는 일을 겪지 않길 바랐다. 남성은 그런 고민 따윈 하지 않아도 되니까. 제발 여자아이는 아니길 바랐다. 임신은 너무 힘든 일이니까. 그저 그런 일을 아예 겪지 않길 바랐다.     


병원에 가기 위해 힘겹게 샤워를 하던 그 찰나에 나는 그런 생각들을 했다. 난 이 땅에 더 이상 여성을 만들어내지 않겠어. 이렇게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여성을 내가 직접 만들어내진 않을 거야. 절박하게도.     


나는 막다른 골목에 있었고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적 바람이었다.     



그 무렵 JTBC에서 방영한 비긴 어게인 속 박정현을 보다 나는 울어버렸다.


여보, 정현 언니는 결혼을 늦게 해서 아이를 낳을지 말지 고민 같은 거 안 해도 되겠지? 부럽다.

정현 언니는 애 낳지 말고 계속 저렇게 자유롭게 노래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나는 그즈음 마흔이 넘어 결혼을 한 모든 유명인들을 부러워했다.          


          



나는 유산으로 상심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예상과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다. 다시 임신을 바라게 되지도 않았다. 다시는 그것이 내 인생에 없기를 바라는 쪽이 되었다. 임신부가 먹을 수 있는 중등도의 진통제가 개발된다면 임신을 고려해보겠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말은, 결국 임신을 고려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 누구도 임신부를 위한 진통제를 개발하지 않을 것이기에.


임신부. 모든 의료기관에서는 진료 시 임신 가능성이나 임신 중인지를 묻는다. 내가 직접 임신을 하기 전까지 나는 그것이 임신부를 신경 써주는 사려 깊은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겪어보고 비로소 그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배려가 아닌 배제하기 위함이다. 모든 치료에서 배제하기 위함이고, 그것은 모두 태아를 위한 것이다. 모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태아를 위해서. 여성은 뱃속의 태아만큼의 중요도도 부여받지 못한다. 대체 왜? 모르겠다고 발뺌하고 싶지만 사실은 알겠다.     

 

여성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임신 전부터, 임신 중에는 더더욱 그저 출산의 도구로 여겨진다.  이 사회의 가부장제는 너무나도 뿌리가 깊어서 도무지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아주 오래전부터 여성은 그렇게 여겨졌다. 그렇게 여겨져 심지어 가임기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신약 개발 시 임상 실험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여성과 남성을 모두 포함시키게 된 것은 얼마 안 된 일이다. 물론 임신부는 여전히 배제되어 있다.      

식품의약국(FDA)은 1977년, 목숨을 위협하는 질병이 아닌 이상 ‘가임기’ 여성이 초기 단계 신약 연구에 참여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식품의약국은 2000년에야 임상시험에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어느 한쪽이 배제되어 있다면 목숨을 위협하는 질병의 신약 연구를 중단시킬 권리를 명시한 새로운 규제를 발표했다.... 임상시험에서 여성의 대표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된 여성그룹이 있다. 바로 임신부다.
출처 : 마야 뒤센베리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뿌리 깊은 모성 신화와 여성 혐오를 기반으로 이 사회는 임신부에게 그저 참을 것을 요구한다. 타이레놀이나 입덧 약은 안정성이 증명되었음에도 임신부가 참아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여성들은 그마저도 망설인다. 태아를 위한다는 이유로. 하지만 그 태아를 품고 있는 여성은? 무려 다른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인간인데 그 여성은 중요하지 않은가?     


대체 왜 임신부가 먹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진통제 하나 없는 걸까. 아픈 여성들은 임신하고, 임신한 여성들은 아프다고 했다. 안 아플 수 없다. 만성 질환이 있는 사람들도 많고, 기나긴 10개월을 아무 잔병 없이 지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임신은 몸 전체의 시스템이 무너지고 교란되는 엄청난 신체의 변화다. 인류라는 종이 계속 보존되는 것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정 아닌가. 그런데 왜 그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케어와 배려는 이리도 부족한 것일까. 왜 여성은 그저 참고 버티며 고통을 삼켜야 하는 것일까.     


안다. 여성이기 때문이다.



소파수술 이후에도 여전히 40 정도의 두통이 남아있었기에 편두통 치료를 위해 신경과를 찾았다. 신도시에 새로 개업한 번지르르한 병원이었다. 이전에는 편두통을 겪은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임신 때 극심한 편두통을 앓았다가 유산과 함께 절반 정도 통증이 감소했다고 이야기했다. 임신 때문에 편두통이 촉발되는 경우가 있냐고 묻자 그는 편두통이 있던 여성 중 1/3은 임신을 하면 오히려 증상이 사라진다고 했다. 그러면 2/3는 여전히 편두통이 있는 것 아닌가? 말장난처럼 들렸다.


‘그럼 2/3는요?’

‘보통 병원에 오지 않기 때문에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럼 집에서 울고 있겠네요.’


그의 말투에는 확신이 없었으며, 쓸데없이 지식과 질문이 많은 내가 다시 오지 않길 바라는 눈치였다. 어떤 진통제에도 반응하지 않아 더 이상 쓸 수 있는 약도 없었으니까. 겉이 번지르르하고 여기저기에서 경력을 쌓아 온갖 것들을 자랑스레 전시해놓은 병원 치고 만족스러운 곳이 없었다. 그 병원은 다시 가지 않았다.     


8월과 9월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죽은 듯 살았고, 산 듯 죽어 있었다. 체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통증은 바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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