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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 Feb 20. 2022

봄은 새 옷을 사기에 좋은 계절이니까

겨울이 끝나가고 있다. 봄이 온다고 밖에 나갈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옷을 사고 싶어졌다. 지난 몇 년간 새 옷은 필요도 없고 못 입는 옷만 늘어 옷을 뭉텅이로 버리던 걸 생각하면 내가 지금 옷을 살 이유는 없다. 그런데 옷이 사고 싶어졌다. 봄이 온다고 내가 갑자기 힘이 솟아나는 것도 아닌데 왜.


온라인 쇼핑몰에서 옷을 고르며 한창 그런 것을 많이 하던 예전의 내가 떠올랐다. 이 옷은 다른 옷과 이렇게 매치해서 입으면 좋겠고, 또 이 옷은 저렇게 활용해 입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머릿속엔 물음표가 생겼다. 근데 그렇게 자주 나갈 일도 없잖아. 나갈 수도 없을 거잖아.


5월 중순에 서울에 있는 병원 예약이 하나 잡혀있다. 다가오는 봄에 나갈 일이 하나도 없는 나는 옷을 고르며 그 약속을 떠올렸다. 5월 12일쯤이면 어떤 옷을 입으면 좋을지 날씨를 가늠해보았다. 가방도 사면 좋겠다. 머리는 위쪽으로 발랄하게 묶어야지. 라며. 내 마음은 이미 5월에 가있었다.


내가 옷을 얼마나 좋아했는지에 대해서는 밤을 새워서라도 말할 수 있다. 작은 투룸에 살면서 방 하나는 온전히 옷방으로 쓰고, 그 방에 옷이 얼마나 쌓여있었는지 쉬지 않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얼마나 자주 옷을 샀었는지도, 한 쇼핑몰의 VVIP 회원이 되기까지 그곳에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도, 얼마나 다양하고 비슷한 청바지와 원피스를 많이 가지고 있었는지도.


하지만 이제 그런 나는 사라졌다. 존재하지 않는다. 4년 전 아프기 시작하며 옷을 많이 입어보고 갈아입는 것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론 그 해 4월, 어리석은 마음으로 약을 한 움큼 과다 복용했는데 그 이후 몸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가려움증이 생겨 부드러운 재질의 옷밖에 입지 못하게 되었다. 약을 먹은 후 눈을 뜨고 며칠이 지나 가려움증이 시작됐을 때, 그전에 이미 주문해 집에 도착한 봄맞이용 린넨 재킷과 면바지를 박스를 열어보지도 않고 반품했다. 입을 수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옷과 작별을 고해야 하는 것은 서글픈 일이었다. 나는 입는 옷을 조금씩 부드러운 것으로 대체해 나갔다. 레이온, 모달, 피치 기모를 사랑하게 됐다. 면 100의 탄탄한 티셔츠도 입질 못하고, 에코백의 캔버스 천에도 가려움에 몸을 사리면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살게 됐다.


유일한 외출인 재활 운동은 집에서 운동복을 입고 나가기에 다른 옷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 병원 외출이라도 했을 텐데 몇 년 동안 내가 뭘 입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옷을 새로 사려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옷을 확인하려고 서랍장을 열었더니 긴팔 칸이 텅텅 비어있었다. 처음엔 옷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입지도 못하는 옷을 다 껴안고 살다가 2019년, 20년, 21년 3년에 걸쳐 옷장을 한 번씩 비워냈던 것이 기억났다. 옷이 어디 갔나 했더니 내가 다 버려버렸구나.


옷을 버리던 시기의 나는, 내가 다시 그 옷들을 입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1년을 내내 아팠기에 옷을 버렸고, 2년을 아파 또 버리고, 3년을 아파 버리니 아끼던 옷까지 미련 없이 다 큼지막한 비닐봉지에 넣어버렸다. 처음부터 그 모든 옷을 포기한 건 아니고, 해를 넘기며 내가 이전의 몸과 멀어졌음을 더 명확하게 인정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더 포기하게 됐다.


포기하고 비우기만 한 게 몇 년이라, 옷을 사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옷을 고르는 내가 생경하다. 이렇게 옷을 고르고는 있지만 이번 봄에는 얼마나 외출을 할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봄이 오고 있고, 나는 더 이상 비울 옷장이 없으니 대신 옷을 조금 채워 넣기로 했다.


몇 년에 걸쳐 나를 포기해왔던 나는, 내가 다시 일상복을 입고 외출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한 조각을 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중간에 주춤하는 일이 잦아 회복세가 느리긴 하지만, 그래도 맨 처음과 통증이 최악이었던 그런 시기들을 생각하면 지금은 하향곡선이 아니라 상향곡선을 그리고 있으니까. 빛을 아예 바라보지도 못하던 작년 이맘때를 생각하면 지금 나는 커튼을 절반이나 젖혀둘 수 있으니까.


그러니 나는 이제 옷장을 비우기보단 조금 채워 보기로 했다. 몸이 가벼운 어느 봄날, 당장 입고 나갈 옷이 없으면 큰일이니까.


봄은, 새 옷을 사기에 좋은 계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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