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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 Mar 05. 2022

나의 INTJ 운동 선생님

그는 분명 ISTJ일 것이다


그가 나와 다른 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난여름 짐볼에 앉아서 하는 동작을 배울 때, 그는 나에게 몸으로 공을 굴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몸으로 공을 굴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했고,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내게 뭘 하라는 게 아니라 그냥 몸 전체를 홀드하고 공만 굴리라고 하는 것이다. 아니, 선생 양반, 내가 지금 그 공을 굴리는 방법을 모르겠다는 거라니까?!?!


하지만 끝내 그는 공을 굴리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공을 굴리는 방법을 다른 말로 풀어서 설명해주지 않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날 나는 집에 돌아와 일기장에 그와 나의 mbti가 완전히 다를 것이라고 적었다.


그것은 분명 대충대충 넘어가는 설명이 아닌, 그 동작을 가장 명확하게 설명하는 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처음 운동을 배우는 범인들은 어떤가. 한 번 듣고 못 알아듣는 일이 많다. 이렇게 듣고도 못 알아들으면 또 다른 말로도 설명해주어야 한다. 그래도 모르면 또 다른 말로, 또 다른 말로... 그것이 평범한 이들이 모르는 운동을 배워나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여기 그가 있다. 경상도 출신, 나이는 비슷하고 심지어 나보다 어린 삼십 대 남성. (어린 게 까불고 있어) 그는 절대 사족을 붙이지 않는다. 모든 동작 설명은 필요한 몇 개의 문장으로 완료한다.


'다리 펴세요'


한 문장만 주면 나는 혼란스러워진다. 일단 다리를 펴는데 다리를 펼 때 고개는 어디를 향해야 할지, 배에는 힘이 들어가야 할지, 어깨엔 힘이 들어가도 되는 건지 알 길이 없다. 한 세트가 끝난 후 질문을 와다다다 쏟아내면 그는 나에게 생각이 너무 많다고 말한다. 으응? 아니 이런 생각은 다들 하는 거 아닌가요?


'제가 동작 설명할 때 큐잉은 단순하게 하잖아요. 거기에만 집중하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 가지 말하면 생각이 분산되니까요. 그거 하나만 하라는 거예요. 제가 말한 거에만 집중하세요.'


'H님은 생각이 너무 많아요. 운동은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생각이 많으니까 안 되는 거예요.’


와다다다 그의 '생각은 필요 없다' 답변. 아니, 근데 동작을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거 아니에... 까지 말하면 또다시 말꼬리가 잘린다. 나는 생각을 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운 사람. 그는 생각을 하는 것을 부자연스럽다고 보는 사람. 그는 분명 T 타입일 것이다. (근데 T는 think의 T 아니었나? 혼란스럽다)(글쓴이 주 : 필자는 mbti를 잘 모른다)


그는 거침없이 말하는 편이다. 살이 좀 붙어서 가면 '주말에 뭐 드셨어요?'라고 말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가감 없이 말해준다. 살이 빠졌다는 이야기도 반대의 이야기와 비슷한 어조로 말한다. 어떤 쪽이든 나는 시무룩해지거나 기뻐하는 등 감정 변화가 있다. 그는 없다. 보고 들은 것만을 말한다. 감정은, 굳이 왜 가지냐는 쪽인 것 같다. 지금까지 관찰한 바 그렇다.


글은 이제 안 써요? 아직도 엄마 기대에 맞춰서 살아요? 같은 질문도 해준다. 내 인생에 필요하긴 하지만 딱히 물어봐 줄 이가 없었던 질문들을 그가 던진다. 생각을 정리해볼 만한 유의미한 질문을 받으면 그날의 일기장은 그 대답으로 가득 채운다. 말수가 많지 않지만 정곡을 찌르는 듯한 한 수를 날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은 작년 여름의 이야기다. 나는 그에게 '문구점이 잘 안 돼요.'라고 하소연하듯 말했다. 그랬더니 그가 '그럼 잘 될 줄 알았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봐요. 왜 잘 될 거라고 생각하는 데요? 잘 되는 게 기본값이 아니잖아요. (그렇죠) 사업은 일단 타겟팅을 해야죠. 문구면 학원 같은 데 팔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아니 제가 만드는 건 그런 문구가 아니라 다이어리 꾸미려고 만드는 문구예요.' ' 그러면 (이하 생략)'


문구점이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아 고민이었는데 왜 당연히 잘 될 것을 기대하냐는 그의 말에 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의외로 상처받진 않았다. 하지만 F 감정형 인간으로선 도저히 예상도 할 수 없던 그의 놀라운 답변…!


그럼 잘 될 줄 알았어요?


그렇다. 대단한 홍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자본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처음 시작하는 사업이 잘 되길 예상해선 안 된다. 현실적인 기대가 건강에 좋다. 잘 될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면, 실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된 사고형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 주문 한 건에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던 F 감정형 인간인 나와는 구사하는 언어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얼마 전 그는 자기 고백적 발언을 했다.


'솔직히 제가 아픈 적 없었으면(그는 3년가량 지독한 통증으로 고생한 적이 있다) 진짜 재수 없는 치료사 됐을 것 같아요. 하세요, 그게 왜 아파요? 그냥 하세요, 이랬을 걸요.'


오호라. 그도 자신의 문제를 알고 있다?!


'그렇죠. 이렇게 센터를 했으면 사람들이 점점 발길을 끊었을 거고, 병원에 있었으면 사람들이 막 -저 쌤은 해주지 마세요- 이랬을 거고'


그러고 보니 타인 공감적 모먼트가 하나도 없는 그가 타인의 통증을 치료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매우 미스터리하다. 그는 감정으로는 전혀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단지 사실에 입각하여 판단하고 행동할 뿐이다. ‘아프다’라는 것은 얼마나 주관적인 단어인가. 그것은 감정이면서 통각이다. 겪어본 사람만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죽도록 아파봤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가 타인의 아픔도 짐작할 수 있는 치료사가 된 것은 그에게도 그를 찾는 아픈 사람들에게도 백번 천 번 좋은 일이다.


‘병원에 있었으면 나름 진상 담당을 잘 하긴 했을 거예요. 아픈지 모르고 계속 시키니까.’


‘아, 그러네요.’


그의 말에 끄덕이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근데 선생님 MBTI가 I…STJ에요?


MBTI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면서 그가 나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며, 얼추 정반대일 것이란 추측으로 알파벳을 하나씩 이어 불렀다. 그동안 그의 팩트 폭격을 맞거나 완벽히 다른 방식의 대화를 이어갈 때마다 그의 MBTI를 얼마나 궁금해했던가! 드디어 진실을 알아낼 순간이 다가왔다.


‘INTJ였어요.’


아깝다. 거의 맞췄는데 하나만 틀렸다. 그래도 하나밖에 안 틀렸으니 거의 맞춘 것으로 하겠다.


‘그게 뭐더라? 용의주도한 전략가? 이런 거래요.’


INTJ… 낯설지가 않았다. 오빠도 INTJ였나? ISTJ였나?


‘그럼 아마 오빠 분도 H님 아프다고 하는 거 이해 못 할 걸요?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아니에요! 그래도 오빠는 저 아픈 거 이해하겠죠…’

라고 말하다가 감정에 북받쳐 금세 눈물이 차오르는 나약한 F 인간이었다. 아, 나약하다. 논리와 이성과 효율로 무장한 세속적인 사람들 사이에선 살아갈 수가 없다. 힘들다.


그의 성격유형을 알아냈으니 정보를 수집해보기로 한다. 나무 위키의 INTJ 문서 항목을 보다 낯설지 않은 구절을 발견했다.


'INTJ는 감정적인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명백한 사실만 말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INFP 측은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배려하는지 여부에 초점을 맞춤.'




어제는 살을 빼고 싶다고 말했다가 또 한바탕 팩트 폭격을 맞고 왔다.


‘살을 빼고 싶다고요? 살을 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덜 먹고 더 움직여야죠.) 지금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둘 다 못 하죠.) 못 하는데 왜 하려고 해요. 왜 국어를 하는데 수학을 하려고 해요 국어만 해야지. 살을 왜 빼요 지금 몸이 좋아져야지. (살찌면 속상하니까요) 속상하다고 살 뺄 수 있어요? (아니요)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요. (살찐 걸… 받아들여요? 이 상태로 만족한다?) 그런 게 어딨어요. 그냥 안 하는 거죠. 살은 못 빼요. (근데 옷 사고 싶은데 사이즈는 하나 작게 사고 싶고…) 옷을 왜 사요. (병원 갈 때도 입고…) 병원 갈 때 입을 옷을 왜 사요. 그냥 운동복 입고 가요. 옷을 어떻게 살 건데요. 밖에 나가면 또 무리겠죠. 인터넷으로 사면 핸드폰 들고 하루 종일 보고 있겠죠. 그럼 손목 더 나빠지고 목도 안 좋겠죠. (네..그럼 다 안 해야겠네요.)


K.O.


의외로 상처받진 않는다. 이상하게 진 것 같은 기분이 들뿐이다.




나무 위키 문서 중 유효한 정보 추가 발견.


1. INTJ 측은 INFP 측에 정보를 전달할 때, 사실만 말하는 데 급급해하기보다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해줄 필요가 있음. - 하지만 그가 부드럽게 말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는다.

2. INFP는 잔소리가 괴롭게 느껴질 수 있으며, INTJ는 자신이 더 어른스럽다고 느낄 수 있음. - 잔소리 같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사실만을 정확히 전달하는 감정도 눈물도 없는 INTJ. 신기한 종족이다. 항상 내 예상을 벗어나는 답변도 나름 재밌다. 종종 흥미롭다. 정말이다.


근데 왜 자꾸 내가 지는 것 같지?




(글쓴이 주: 나는 mbti에 그리 집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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