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하는 법
또 툭하면 편두통이 시작되는 시기가 왔다.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나를 지키는 방법을 찾았다. 바로 휴대폰 쓰지 않기다.
두통에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습관처럼 자꾸 들여다보게 되던 휴대폰인데 이렇게 몸이 나 죽겠다고 퍼지면 ‘휴대폰 하지 않기’라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불가능할 것 같은 미션도 도전해볼 수 있다. 이 글도 노트에 쓰고 있다. 아플 때만 줄이지 말고 평소에도 줄이자. 실패에서 깨닫는 게 없나, 나란 인간?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편두통에서 벗어나고자 휴대폰과 멀어지기로 했다. 정확히는 전자기기로부터 멀어지는 것인데 처음 놓은 것이 노트북, 그다음 포기한 것이 TV, 그리고 마지막 휴대폰의 차례다.
일도 없고 밖에 나갈 체력도 없는 사람이 집에 가만히 있으면서 휴대폰을 쓰지 않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세상 소식도 보고, 기사도 보고, 인스타그램도 보고, 책도 사고, 택배 반품도 하고, 메모장에 글도 쓴다. 휴대폰 하나면 완성되는 하루다. 한 번에 끊는 것은 어려워 보이니 서서히 멀어져 보기로 한다. 엊그제 휴대폰 사용시간은 9시간, 어제는 5시간, 오늘은 4시간으로 줄였다. 휴대폰 스크린타임 잠금은 5시간으로 설정해두었다.
휴대폰을 일상에 남겨두기로 했다면, 사용 용도를 제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연락 용도로는 무조건 쓴다. 인터넷 쇼핑은 하지 않는다. 글은 휴대폰 대신 노트에 쓴다. 인스타그램 게시물은 일주일에 2회 정도만 올린다. 인터넷 기사는 하루에 한 번만 확인한다. 끝. 이러면 하루 사용 시간을 두 시간 이하로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첫째 날, 스크린 타임 27분. 도전에 완벽하게 성공했다. 팟캐스트를 틀어 놓은 채 종일 누워 쉬기만 했다. 지금은 책을 읽는 것도 글씨를 쓰는 것도 여의치가 않다.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지내는 것이 상책일 것 같다.
만성 편두통 환자로 지낸 지 일 년 하고 두 달이 더 지났다. 솔직히 작년 일 년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잘 모르겠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항상 머리가 안개에 싸인 듯해서 내 앞에 놓인 것만 겨우 보며 걸었다. 편두통에 시행되는 치료법을 모두 시도해봤고, 그중 두 가지는 유지 중이다. 그럼에도 편두통을 유발하지 않도록 자세를 낮춘 채 살아야만 한다. 한 달 내내 잘 조절하다가도 단 하루 몇 시간만 무리하면 일주일 정도 숨만 쉬어도 편두통에 시달리는 편두통 주간을 맞이한다. 그리고 지금도 편두통 주간의 한가운데 있다.
2018-19년의 통증은 끔찍했다. 그런데 작년부터 시작된 2021-22 편두통은 또 다른 결로 괴롭다. 지치고 지긋지긋하다. 편두통이 터지면 들을 수도, 볼 수도, 먹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이 그저 가만히 있어야만 한다니 가혹하다. 그런 괴로운 날들을 셀 수도 없이 겪게 되면, 겨우 찾은 평화로운 몇몇의 날들 뒤에 또 편두통 어택이 올 때, 그냥 살고 싶지 않아 진다. 죽고 싶진 않지만 지금 이것은 그만하고 싶어 진다. 그만하는 방법이 살지 않는 것뿐일 따름이다.
확장된 혈관이 쿵쿵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버티는 편두통의 시간은 외롭고 고독하다. 까만 밤에 나 혼자 있는 것만 같다. 일 년 간 그렇게나 열심히 통증을 치료했는데도 편두통 때문에, 고작 편두통 때문에 계속 주저앉아 있는 게 분하고 원통하다. 아니, ‘고작 편두통’은 아니지. 편두통 때문에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 있는 내가 그걸 ‘고작’이라는 말로 부를 수나 있는 걸까? 이렇게 매번 처참하게 패배하면서?
내가 오늘 휴대폰을 27분밖에 쓰지 않았다고 남편에게 내보였을 때 그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네’라며 약간의 놀라움을 내비쳤다. 왜냐하면 어제 휴대폰 사용시간을 2시간으로 제한하기로 했다가 그건 너무 빡세다며 그가 3시간으로 늘릴 것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나도 내가 2시간을 꽉 채워 쓸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남편과의 연락, 인터넷 기사 1회 속독, SNS 1회 접속, 택배 반품 예약, 팟캐스트 재생 밖에 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나로 살며 나를 편두통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지켜낸 것이다. 아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나는 아프지 않기 위한 것이라면 꽤 진심을 다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픈 게 5년째, 편두통 2년. 그런 내가 뭔들 못 하겠어?
TV를 포기하고 나서는 풍선 효과로 휴대폰 사용량이 늘었다. TV 콘텐츠를 휴대폰으로 찾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럴 거면 TV를 안 보는 의미가 어디 있나 싶을 정도로 한심한 행보였다. 하지만 65인치 발광 물체보단 고작 한 손 크기의 작은 디스플레이가 내 눈과 뇌에 더 적은 부하를 주었고, 결정적으로 김태리와 남주혁이 너무 예뻤다. 아예 한 번도 보지 않았으면 모를까, 그들의 드라마 1,2화를 마지막으로 TV를 끊은 나는 그들의 세계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건 나의 완벽한 실패가 아니라 예상치 못한 강한 공격 상대의 등장이라고 해두자.
TV를 끊었을 땐 그 시간과 관심을 휴대폰으로 해소했는데, 이제 휴대폰을 끊기로 했으니 내 세상의 어떤 부분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를지 궁금해진다. 아무것도 부풀어 오르지 않고 납작한 병어처럼 내내 바닥에 붙어 지낼 수도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나를 지켜내는 그 한 가지를 계속 도전한다. 휴대폰 사용을 최소화한다. 아프지 않을 수만 있다면, 사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도전 18일째. 여전히 휴대폰과 거리두기에 성공하고 있다. 가끔 휴대폰이 옆에 있으면 만지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하지만 역시나 아프지 않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느껴진다.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는 편두통의 세계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만은 지키고 싶어 진다. 나를 지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