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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 Apr 02. 2022

사라지지 않는 글쓰기

이 글은 글을 계속 쓰겠다는 다짐이다.


아침에는 휴대폰을 조금 쓸 수 있지만 오후가 되면 그마저도 손에서 놓아야 한다. 요새 들어 오후에 두통이 시작되지 않았던 날은 손에 꼽을 정도인 것 같다. 매일 두통에 지고 낙담하고 잠으로 하루의 경계를 나눠 다시 두통 없는 날이 오길 바라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하루 종일 내가 하는 일은 거의 없고, 그조차도 최소한으로 제한되어 있어 나 자신이 꽁꽁 묶여 버렸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움직일 수 있고, 뭔갈 할 수도 있지만 그 후에 두통이 시작돼 버리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사실 두려운 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만성 편두통 환자도 매번 통증이 두렵다. 적절하게 약을 복용하면 두통이 금방 가라앉는다는데 나는 아직 그 적절한 약을 못 찾았는지 두통이 시작되면 그날 하루는 그걸로 끝이다. 그냥 끝도 아니고 더 나빠지면서 끝나기도 한다. 그러니 내가 두통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특별히 무리가 되는 행동이 두통을 유발하는 건 안다. 그런데 그런 것 말고 점심 준비하기, 먹기, 화분에 물 주기, 다이어리 쓰기 같은 것을 하고 나서도 두통이 시작되기도 한다. 늘 조심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다.


며칠 전에는 아파트 장터에 나갔다 왔고, 다이어리를 조금 썼는데 어질 하는 느낌이 들어 침대로 가 누웠다. 처음 두 시간 반은 약을 먹지 않고 버티다 결국 편두통 치료제 한 알을 먹었고, 그로부터 두 시간 후엔 이부프로펜 두 알을 추가로 먹었다. 그런데도 두통이 잡히질 않아 한 시간이 지난 후에는 울트라셋을 먹었다. 취침 약을 먹었으니 어찌어찌 잠이 들긴 했지만 잠이 들기 전까지도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속상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오랫동안 못 느끼던 종류의 통증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편두통 예방약도 먹고, 보톡스 치료도 받고 있는데 두통은 내가 놓은 보호장치의 사이사이를 빠져나가 결국 내 머리를 터트리는 것 같았다.


- 나 어제 그거 온전히 편두통 아니었어. 편두통도 있었는데 그냥 두통도 같이 있었어. 예전에 아팠던 느낌인데 어제 엄청 아팠어. 머리 빠개지는 줄 알았어.


다음날 일어나서는 전날 겪었던 두통에 대해 남편에게 설명했다. 아프고 있을 때는 말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작년 11월, 12월은 분명 편두통 일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그런데 3월엔 스무날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굳이 센다면 서른 날에 가까워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보톡스 치료는 받을수록 편두통 일수와 강도가 줄어든다고 했다. 지난번 치료일-2월-까지는 나도 분명 그랬다. 그런데 지금 보톡스 효과도 최상이어야 하고 두통일수가 한 달에 한 자릿수로 줄었던 내가 다시 한 달 내내 아프게 되다니 정말 도통 알 수가 없다. 두통, 편두통, 뇌, 혈관, 보톡스. 아무것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눈앞엔 항상 안개가 있다. 귀에는 이명이 들린다. 침대에 눕거나 일어날 때처럼 머리의 높낮이가 달라지는 동작을 할 때면 머리가 특히 어지럽고 지끈거린다. 그래서 느리게 움직이고 궁극적으론 최소한으로, 그러니까 거의 안 움직이는 쪽을 택한다.


여기까지 쓰고도 머리가 아파 한동안 누워 쉬어야 했다. 그럴 거면 글을 안 쓰면 되지 않겠니? 나에게 묻지만 결론은 하나다. 나는 결국 언제나 쓴다는 것이다. 남들이 유튜브를 개설하며 영상의 세계로 떠날 때 나는 브런치에 자리를 펴고 앉아 글을 쓰기를 택했다. 뭐가 됐든 썼을 것이다. 지금은 아프기 때문에 아픈 이야기를 쓰는 것뿐이다. 장강명 작가는 창작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했다. 정여울 작가는 너무 외로워서 글이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순간 작가가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직 작가가 되진 못했지만 두 가지를 합한 것이 나다. 머리가 아파 누워 쉬면서도 머릿속에선 첫 문장이 시작된다. 머릿속에서 시작된 문장을 받아 적지 않은 적은 수없이 많다. 머리가 아파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게 사라진 많은 문장들이 있다.


내가 어떻게든 쓰려고 한다는 게 문제다. 아니, 그건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글로라도 쓰지 않으면 나는 이 공허함과 절망과 헛헛함을 달랠 수 없을 것이다. 글이라도 쓴다. 너무 외로워서 글이라도 써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아픈 이후로 나는 쭉 그런 기분이었다.


글쓰기에 대해서는 매번 생각이 바뀐다. 지금까지 썼던 글들을 다 없던 것으로 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목차를 쓰는 것까지는 마음을 먹었다. 그다음으로 이것을 계속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에선 자꾸 머뭇거린다. 안 쓰면 머리가 편하고 쓰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쏟아져 나오는 신간들에 시기심을 느끼는 쪽이면 당장 책을 쓰는 편이 낫다는데, 나는 시기심에 불타오르기도 하지만 기운이 없어 자주 주저앉는다. 내가 뭘 쓸 수 있을까? 조금만 글을 쓰면 금세 두통이 생기고, 두통에 대한 글만 오백 개씩 쓰고 있고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 내가 뭘 어디로 가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어디인지는 몰라도 지금 여기 이 자리에 머무는 것만은 아닌 걸 알겠다. 마음이 불편하다.


술라이커 저우아드의 엉망인 채 완벽한 축제』를 읽었다. 저자는 백혈병을 4년간 앓았고 생존했다. 나는 그 글의 경이로움에 압도당했다. 나 같은 사람이 아픈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하잘 것 없이 느껴졌다. 나 따위가 글을 쓸 수나 있을까? 죽지도 않을 병으로? 하지만 글쓰기가 ‘내가 더 아파’ 대회가 아닌 것은 안다. 병의 크기를 비교하진 말자. 하지만 아무래도 기세가 꺾이는 건 사실이다. 책을 읽고선 얼마간 무기력의 늪에 빠져 있었다.


내가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크게 두 개의 차원이다. 하나의 차원은 신체의 고통이다. 통증, 두통, 어지러움, 기력 없음 등 뭐가 됐든 내 몸인데 내 맘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서 한 번 좌절한다. 다른 차원은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다. 내가 어떤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든 의미를 창조하기 위해 몇 년간 글을 써왔지만 다시 읽으면 창피하기 그지없고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의 졸작만 남았다. 어떤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한 것 같아 끝도 없이 우울해지곤 한다.


그렇게까지 우울해질 일이면 써야 한다. 쓰면 될 일 아닌가. 여기엔 어떤 거대한 두려움이 있다. 시간을 이만큼 들여서도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한 내가 그걸 처음부터 다시 쓴다고 뭐 크게 달라질 게 있겠나 하는 나에 대한 불신, 불확실함이다. 다시 쓴다는 게 말만 쉽지 어디 간단한 일인가? 근데 왜 굳이 다시 쓰고 싶은데? 지금 이 상태론 서로 어울리지도 않는 구슬만 서 말이고 꿸 수도 없어서 구슬부터 다시 골라야 한다. 지금 있는 건 진짜 구슬이 아니다. 진짜 구슬을 만들어야 한다.


책을 가지러 방에서 나오다 현기증에 풀썩 쓰러졌다. 말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다. 이 정도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조용히 불 끄고 누워 쉬는 게 나을 것 같다. 글을 쓰겠느니 어쩌겠느니 인생의 의미가 있느니 없느니 씨름하지 말고 당장 육체의 평안함이라도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러고 누워선 또 머릿속으로 첫 문장을 시작하겠지.


수도 없이 시작했던 첫 문장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수도 없이 그려본 천장의 도형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주로 누워 있었고 집안에서만 조금씩 움직였다. 멍하니 아무 생각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며 저녁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취침약을 먹고 잠에 들길, 틀림없이 아프지 않은 잠의 세계로 빠져들기만을 기다렸다. 아침에 눈을 떠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땐, 내가 나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길 기대했다. 아파서 죽을 것 같지만 죽지도 않는 이 수많은 날을 견뎌내고 내가 도대체 무엇이 되어야 할지 결론이 있길 바랐다. 내가 되어야 할 무언가가 있길 바랐다. 그래야 죽지 않고 버텨 쭉 살아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을병이 아니다. 죽을병은 무슨, 난 여전히 어느 병원에 가도 어느 검사에서도 이상이 나오지 않는 사람이다. 내 삶은 이렇게 이상 투성이인데도.


안 쓰면 머리와 목과 어깨가 편할 것이다. 쓰면 모두 다 불편하겠지만 마음은 편할 것이다. 여러모로 쓰는 쪽을 택했다.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든 없든 간에 내가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이 긴 시간을 버텨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잠깐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또 현기증이 나 풀썩 주저앉았다. 느리게 일어나고 느리게 쓰자. 시간은 많고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글은 글을 계속 쓰겠다는 다짐이다. 아플 때마다 흔들리고 생의 끝까지 갔다 오길 반복하는 부서지기 쉬운 유리알 같은 나를 대신해 종이 위에 눌러 담는 단단한 마음이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나는 계속 쓰는 쪽을 택했다. 맘에 들지 않는 글은 버리고 다시 쓰면 된다. 처음부터 다 다시 써도 된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맘에 들지 않는 조각들을 들고 계속 맘고생을 하느니 한 번 뒤엎는 게 나을 것 같다. 편두통에 잠식당할 때마다 ‘내가 사라졌으면’이란 노래를 떠올리며 내가 자꾸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만을 바랐지만 나는 나의 의미를 찾을 것이고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글을 쓰는 한 그 무엇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책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포기하는 것을 포기하자. 의미를, 실존을, 흔들리지 않는 삶의 중심을 거머쥘 수 있는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다.
『책 한번 써봅시다』 - 장강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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