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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 Apr 09. 2022

처음부터 다시 쓸 수 있을까

글을 처음부터 다시 쓰기로 했다.


브런치에 쓴 글을 모두 모아 한글 파일로 저장했다. 이전 노트북엔 브런치에 올리기 전 원본 파일이 있지만 거의 모든 글을 브런치 발행 후 다시 읽어보며 야금야금 고쳤기 때문에 원본과 같은 글은 하나도 없을 터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현재 노트북(맥북에어)에는 USB 단자가 없다. 그래서 브런치에 있는 글을 한글 파일로 옮겨 저장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별 대단한 작업은 아니지만 나는 전자기기를 오래 쓰면 머리가 아프니 이틀에 나눠했다. 어제 절반을 하고, 오늘 나머지를 했더니 저장 작업이 끝났다. 통증기를 쓰기 시작한 게 20년 4월이었고, 체계적으로 몰두해 쓴 것은 처음 너 다섯 달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쭉 뭔갈 써왔다고 생각했는데 다 모아놓고 보니 글이 너무 적었다. 2년 동안 내가 한 일이 이게 다라고 하기엔 너무 적은 양이었다. 나는 글이 너무 많아 버릴 글을 고르기가 힘들 줄 알았는데 버리긴 무슨, 있는 글로는 책은커녕 책등도 못 만들 것 같아 앞으로 2년 정도는 글쓰기에만 매진해야 할 것 같았다.


2년 전 글쓰기를 처음 시작할 땐 손으로 쓰고, 한글에 타이핑하고, 뽑아서 퇴고하고 다시 노트북으로 고치고 그걸 브런치에 붙여 넣기 하여 발행하는 방식을 썼다. 그땐 목차도 있었고 나름 계획적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서른다섯 개 정도의 글을 쓰면 끝나는 여정이었다. 그런데 나는 스물둘에서 멈췄다. 내가 처음에 계획한 목차대로 쓴 것은 22번 글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는 그냥 썼다.


출간 제의를 한 번(그것도 딱 한 번) 받아서 목차를 이리저리 고치다가 그 건이 불발되자 길을 잃은 듯 헤매기 시작했다. 그즈음에 문구점도 시작했다. 겨울엔 손 수술도 했지 아마. 그러다 새해, 21년이 되어선 왜인지 모르게 내내 만성 편두통에 시달리게 되었고 나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집의 뼈대를 세우지 못하고 임시 거처에서 비바람이 멈추기만을 바라는 사람이 되었다.


몇 번이고 집, 그러니까 내가 쓰고자 하는 이 글의 뼈대를 다시, 그 무엇보다도 단단히 세우고 싶었지만 편두통이란 고약한 놈을 만나 하, 난 메타인지적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후들거리는 기둥을 부여잡고 빛과 소리를 피하면서 버텨온 것이었다.


편두통 죽일 거야, 말고 내가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내 글이 굳이 세상에 필요한가?’하는 자문이었다. 이거 흔들거리는 기둥 내가 어떻게든 붙들고 안 쓰러지게는 버티고 있는데 이게 굳이 이 세상에 필요한 일인가? 아니면 나에게라도?


작년은 개인 신변과 몸의 회복세에도 큰 변화가 있었기에 무슨 글을 어떤 방향으로 써야 할지 막막했다. 학교를 그만두었고 다시 재활을 시작했다. 나을 수 있는 건지 아니면 계속 편두통의 까만 밤 속에 사는 건지? 나의 운동 선생님은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도통 희망을 가질 수가 없었고 그래서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짧은 글들은 썼지만, 22번 글 다음의 목차는 쓸 수 없었다. 그땐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내가 나아진다는 결론은 그가 처음부터 계속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알고는 있다. 단지 내가 실감하지 못할 뿐이다. 아직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머리가 너무 아파 노트북도 휴대폰도 못 쓰고 어두운 방에서 노트에 아무도 못 알아볼 글씨를 휘갈겨 쓰던 시기를 지나 그 글씨를 해독해 노트북으로 옮겨 적을 수 있게 되자 나아진다는 말을 또다시 조금 믿어보게 되었다. 매일 산책을 해도 괜찮네? 그럼 다시 글을 써봐도 되지 않을까?


목차를 새롭게 쭉 써 내려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마침내 수영을 하게 된다는 결론으로. 그동안 쓴 글도 한글 파일로 저장하며 쓱 훑어봤는데 아무래도 글은 모두 다 새로 써야 할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기록의 파편들은 이곳저곳에서 발견되었고, 온전한 글을 말하는 거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 건 맞는 것 같다. 목차를 적었더니 일단은 설계도가 생겨서 다시 집을 지어볼 만해졌다. 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대공사라니 조금 엄두가 안 나기도 한다. 이걸 또 언제 다시 쌓아 올리지?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마감도 독촉도 없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느긋하게 가자.


목차  . 이건 단지 시작의 시작일 뿐이다.   장이 원고지 600매가 되는 일을 해내야 한다. 사주에 () 많아 추진력은 좋지만 용두사미인 격이 많다는 나는, 그래도 이번에는 뭔가를 끝내 보고 싶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완성된 하나를 만들어 보고 싶다. 그런데 정말 다시   있을까?



(새로 다시 쓰는 글은 첫 글이 언제 완성될지 모르지만, 글을 새로 쓰면 내용상 겹치는 기존의 글을 순차적으로 삭제할 계획입니다. 그렇게 하면 지금 있는 브런치 북은 삭제될 거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몇몇 글만 이 ‘통증의 시간들’ 매거진에 남게 될 것 같습니다. 지금은 목차 말고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어요. 그래도 일단 말을 뱉어 놓으면 지키기 위해서라도 쓸 것 같아 글을 올려 봅니다. 새로 다시 쓰기를 포기한다면 어느 날 이 글은 삭제되고 없을 거예요. 지금 목차로는 일주일에 한 개씩 써도 올해가 다 지나는 데요... 어쨌든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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