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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 Apr 21. 2022

올봄엔 날마다 산책을 하고 싶어

봄엔 뭐 하고 싶으세요?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에서 B가 물었고 나는 방금 전 잭 래빗 동작을 끝낸 후 숨을 고르느라 멍한 상태였다. 내가 봄에 뭘 하고 싶지? 하고 싶다 한들 할 수나 있나? 어차피 봄도 이제 얼마 남지도 않은 것 같은데,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휘리릭 스쳐갔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요. 그냥 산책? 산책, 할래요. 나는 얼마 남지 않은 봄의 끝을 잡고 산책만 하겠다고 말했다. 다른 건 어차피 할 수 없을 테니까. 무리해서 뭔갈 했다간 또 고꾸라질지도 모르니까.


올해 들어선 매달 한 번씩은 크게 몸살이 났다. 1월엔 일주일, 2월엔 보름 정도, 3월엔 열흘, 4월엔 다시 일주일. 봄이 오니 무언갈 해봐야지라고 생각했던 것은 모두 다 생각으로만 남았다. 긴 겨울을 보내고 봄 산책을 시작했는데 눈을 깜빡하면 편두통과 싸우느라 일주일이 지나있고, 또 잠깐 방심하면 온통 앓으며 집에만 내내 있는 날들이 계속됐다. 대체나 새로운 목표를 세우거나 희망을 가지긴 어려운 상태였다. 4월 중순인데도 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은 1월부터 지금까지 매달이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지났기 때문이다. 이 봄도 눈을 한 번 깜빡하면 금세 파란 여름이 되어 있을 것 같았다.


운동을 갈 때마다 첫 화두는 지금 몸 어느 곳이 불편한가 이다. 나는 요새 흉부, 오른쪽 목부터 어깨 부위가 아프다. 특히 오른쪽 상체 부위의 통증은 글씨를 쓰는 자세에서 나타나고 글씨를 쓰면서 악화된다. 글을 손으로 쓴 다음에 컴퓨터로 옮긴다고 하셨나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이젠 글씨 쓰는 것을 금지당할 차례인가 싶었다.


바른 자세로 쓰면 괜찮지 않을까요?

지금은 바른 자세를 못하는 상태예요.

그럼 아프기 전까지 짧게만 쓰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건 괜찮은 게 아니라 몸이 버티는 거죠. 안 해야죠.


요새 나의 즐거움인 글씨 쓰기를 수호해보려 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글씨를 쓰지 않는 편이 낫다는 건 나도 아는 사실이었지만 공식적으로 금지당하니 시무룩해졌다. 새로 주문한 만년필은 어쩌지? 사실은 그날 아침에 만년필 한 자루와 닙 한 개 (기존에 있는 만년필에 다른 굵기의 펜촉을 바꿔 끼워볼 생각이다), 만년필용 노트 서너 권, 만년필로 필기하기에 좋은 A4용지 한 박스를 주문한 참이었다. 고심 끝에 고른 필기구였는데 하나도 쓸 수 없게 되어버렸다.


만년필은 쭉 쓰고 있었지만 최근에 왠지 모르게 더 몰두하게 되었다. 만년필을 세척하고 잉크를 새로 넣어주면 괜스레 뿌듯하다. 일일이 세척하고 물기를 말리고 잉크를 직접 주입하는 일련의 과정은 손이 많이 가긴 하지만 즐거운 수고로움이다. 그날그날 쓰고 싶은 만년필을 골라 책을 읽다 발견한 좋은 문장들과 일상의 감정들을 종이 위에 옮겨 적는다. 평소보다 손에서 힘을 빼고, 마음은 편하게 속도는 느리게. 단순한 동작에 몰두해서 일까, 글씨 쓰기에만 집중하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평온해진다. 그렇게 날마다 여러 장의 종이를 채웠다.


그런데 앉아서 글씨를 쓰는 동작은 지금의 나에게 가장 안 좋은 자세이다. 필기를 시작한 지 십여분쯤 지나면 목과 어깨 깊은 곳에서부터 통증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목 끝부터 어깨 끝까지 온 근육이 뻣뻣해지고 작열감이 느껴진다. 사실 이곳은 나의 가장 고질적인 통증 부위로 수년간 나를 괴롭혀 왔다. 그런 몸으로 내 욕심에 계속 글씨를 썼다. 티비를 보지 않는 것처럼 글씨 쓰기도 웬만해선 중단해야 한다. 일기나 불렛저널 때문에 손글씨를 완전히 포기할 순 없겠지만 되도록 아날로그보단 디지털로 적는 편이 지금의 나에겐 지속 가능할 것이다. 편두통을 피하려고 종이에 글을 쓰기로 했는데 이젠 글씨 쓰는 동작이 문제라니, 까다로운 몸이 아닐 수 없다.


집에 돌아오는 길엔 상큼한 과일이 먹고 싶어 마트에 들렀다. 아이스크림 가게로 가려다 이왕이면 몸에 좋은 것으로 속을 채우고 싶어 마트로 방향을 틀었다. 상큼하고 부드러운 과일, 수많은 과일 중에서 나는 부드러운 과일을 골랐다. 턱이 아파 아삭 거리는 것은 먹기가 힘들다. 자칫하면 턱만 아픈 게 아니라 편두통까지 유발할 수 있어서 먹는 음식도 조심한 지 꽤 되었다. 골라 든 것은 씨 없는 청포도 한 팩. 이 정도면 씹을 수 있겠어.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글을 노트북으로 쓰고 있다. 책상 위에는 만년필 열 자루 정도가 널어져 있다. 일기는 써야 할 테니 최소한의 만년필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세척해서 다시 파우치에 넣어둬야겠다. 아쉽지만 별 수 있나. 아프지 않기 위해 포기한 것이 수도 없이 많다. 티비도 기타도 아삭한 사과도 포기했다. 언젠간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지금은 지금의 나를 위한 선택을 하는 것뿐이다.


오늘도 날이 눈부시게 맑다. 사람들은 봄이라서 하고 싶은 일이 있을까. 봄이면 하고 싶은 일이 생겨나는 걸까. 적어도 아프기 전의 나는 봄을 기다렸던 것 같다. 봄이 오면 공원에 가고 이곳저곳 나들이 가는 것을 기다렸던 것 같다. 지금은 그럴 수 없을 뿐. 할 수 없다는 걸 아니 크게 욕심을 부리는 일도 안 하게 된다. 나의 한계를 덤덤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쉽진 않았지만 벌써 다섯 번째 맞는 봄이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안다. 괜한 무리를 했다가 몇 발자국이고 뒤로 걸을 수 있다는 걸 안다. 몇 년 동안, 그리고 몸이 꽤 나아진 올해의 지난 몇 달 동안 직접 겪으며 알게 된 사실이다.


무리하지 않는다. 올봄 나의 목표는 무리하지 않는 것뿐이다. 어쩌면 내 평생의 생활지침이 될지도 모를 말이다. 그렇다고 매일 집에만 있는 건 곤란하다. 아파서 누워만 있다가 벌떡 일어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체력을 기르려면 일어나 걸어야 한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날마다 산책을 하자는 쉬운 목표도 이루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다 얼마 전 4년 만에 처음으로 일주일 내내 산책하는 것을 성공했다. 하루에 겨우 15분에서 20분 남짓이었지만 날마다 바깥에 나갈 수 있는 컨디션이 된 것은 유의미한 변화였다. 일주일의 산책은 내가 조금 더 희망을 품어볼 수 있게 했다. 나로선 큰 성취였다.


올 봄에 하고 싶은 일이라면, 그저 산책하는 것뿐이다.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라게 된다. 날마다 산책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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