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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 May 23. 2022

엉망인 부분은 되도록 들키고 싶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 습관처럼 핸드폰을 만지다 손흥민의 득점왕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할 것 같았는데 결국엔 해냈네. 졸린 눈을 비비며 영상을 여러 번 돌려 보고 sns를 구경했다. 이런 큰 경사를 맞아 오랜만에 오빠에게 연락을 해보았다. ‘손흥민 득점왕 미쳤음’ ‘지금이 전성기인 듯’ ‘다음 월드컵까지는 할 듯’ 남매는 손흥민을 오래 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 그의 미래를 점쳐 보았다.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3-4년 더 그의 멋진 플레이를 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런데 그걸 한 번쯤 직접 볼 수 있으면 더 좋겠다.


다음 월드컵까지는 나갈 것 같다는 오빠의 메시지에 나는 손흥민이 은퇴하기 전에 영국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슬퍼지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까지 괜찮아지는 날이 오긴 할까?


가서 보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없어서 그저 그가 다음 월드컵에도 나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반복하곤 대화를 끝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할 수 없었다. 내가 사실 두통 때문에 아무것도 하질 못한다고, 오늘 아침도 그냥 사라져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엉망으로 살고 있는 점은 되도록 들키고 싶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 누워서 영상을 보긴 했지만 상태가 괜찮진 않았다. 새벽에 깰 때마다 두통에 시달렸고 아침엔 그 두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2주가 넘도록 반복돼 온 패턴이었다. 사실은 산책을 못하게 된지도 2주가 넘어가고 있었다. 편두통 급성기 약은 5월에만도 어느새 13알을 먹어버려 이젠 더 이상 먹으면 안 될 것 같다. 참는 날만 늘어난다.


산책도 못하는 일은 꽤 별로다. 마음이 답답하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그냥 좀 걷고 오면 좋을 것 같은데 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편두통 때문에 마음이 답답하고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싶기도 한데 그럴 때도 걸을 수 없다. 편두통이 있을 때 걷는 것은 무조건 상태를 악화시킨다. 지난주엔 그냥 햇볕만 쬐고 오겠다는 생각으로 집 앞에 나갔다가 상태가 나빠져 돌아왔다. 한동안 침대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일을 한 번 겪고 나면 한껏 움츠러든다. 괜찮다는 확신이 없고서는 신발을 신고 밖에 나갈 수 없다. 또 창문 안쪽에서 바깥만 내다보는 사람이 되었다.


불과 한 달 전엔, 거의 매일 산책하곤 했다. 그건 내가 아픈 이후 처음으로 이룬 쾌거였고 그렇게 몸이 좋아질 일만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편두통도 두 번 밖에 오지 않았고 십 분을 겨우 걷던 내가 삼십 분을 거뜬히 걷게 됐다. 상승곡선에 잠시 기분이 좋을 뻔도 했다.


다시 편두통에 잠식된 날들에 갇혀버릴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세 달이 지나 새로 보톡스 주사를 맞았고, 그 주사의 효과가 나타날 때쯤이면 다 괜찮아질 거라 믿으며 견뎠다. 이제 힘을 주어도 미간에 주름이 잡히지 않는데도 편두통은 여전히 날마다 존재를 드러낸다. 이번 편두통 주간은 대체 언제 끝날까.


통증의 강도를 1에서 10까지의 숫자로 표현해보라는 말을 듣는다. 나는 말하자면 임신 때 강도 10의 편두통을 겪었다. 전에도 없었고 다신 없어야 할 통증이었다. 지금 내가 겪는 것은 그때에 비하면 반의 반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통증은 아니다. 내가 노트에 2라고, 3이라고 쓰는 날도 혹은 1.5라고 쓰는 날도 모두 난 산책을 할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내가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냥 바람을 쐬면서 한 바퀴 걷고만 싶다. 그냥 걷고만 오면 다 나아질 것 같다. 몸을 움직여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싶다. 하지만 이렇게 편두통이 나를 계속 잡아끄는 때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잠을 자고 또 자도 안 아픈 하루가 시작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예전 같으면 손흥민의 마지막 경기쯤은 당연히 생방송으로, 맥주 한 캔과 안주를 앞에 두고 봤겠지만 지금의 나는 다음 날 아침에 아픈 머리를 누르며 겨우 영상으로 확인할 뿐이다. 아프기 전 밤늦게 경기를 보던 기억이 떠올라 왠지 쓸쓸해졌다. 앞으로의 내 인생엔 없을 장면들일 것이다. 늦은 밤 경기를 보던 기억, 과자 꾸러미, 맛있는 세계맥주 같은 것은 이제 모두 과거에만 존재한다.


가족들과 거실에 모여 맥주를 마시면서 레버쿠젠 시절 손흥민의 경기를 보던 때가 떠올라 자꾸 눈물이 날 것 같다. 울어 버리면 다신 그러질 못한다는 걸 인정하는 것 같아 울고 싶지 않은데 결국 난 울어 버린다.


 어제 경기도 생방으로  봤고, 사실 엉망이야. 오빠  사실 되게 엉망이야.


엉망으로 우는 부분도 들키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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