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쓰는 글은 다 파편이다. 제대로 완성한 한 편이 하나도 없다. 이거 쓰다 저거 쓰고 다시 이거 쓰고 그런다. 어디에도 집중하지 못한단 소리다. 어느 것도 글이 쭉쭉 잘 나가지 않는단 소리이기도 하다. 잘 안 되니까 다른 주제를 쓴다. 그것도 안 되니까 또 다른 주제를 들고 와 쓴다. 그러다 보니 벌여놓은 글만 많아진다. 뭐 하나 완성도 못하고 정신만 산만해진다. 난장판이다.
현 시국을 타파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노트북을 끈다. 노트를 치운다. 1번 방으로 돌아온다. 앤 라모트의 『쓰기의 감각』 을 펼친다. 수없이 붙여진 인덱스 중에서 나에게 필요한 딱 그 문장을 찾아 읽는다.
지금 단계에서는 그 정도면 충분해.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해나가기만 하면 돼. 하지만 여기서 이 짧은 글 한 편을 마무리하는 거야, 알았지?
짧은 글 한 편, 짧은 글 한 편.
용기를 품기 위해 오늘 오후 책상 앞에 추가한 메모도 있다. 대니 샤피로의 『계속 쓰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면 좋겠다.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핑계라면 수 십 개도 들 수 있다. 요새 기분이 좋지 않고 이유 없이 졸려서 집중하기 힘들고 어제저녁의 두통이 조금 남아있었다. 목차를 새로 쓰고선 내용이 중첩될 수 있는 세 꼭지를 발견했는데 그렇다고 하나로 합칠 수는 없다. 적절하게 분배하여 써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적절함의 기준을 모르겠다. 이미 써넣은 글이나 일기를 글 하나에 녹여내는 것도 쉽지가 않다. 조잡해지는 것 같다. 글을 시간순으로 써야 할지 지금 잡히는 대로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순서 없이 쓰다가 내용이 겹치는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있다.
다 차치하고 이 글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은 이제 놀랍지도 않을 정도다. 내가 진짜로 책을 내고 단 한 명에게라도 내 글이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실제로 듣기 전까진 난 계속 내 글의 쓸모에 대해 확신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채로 계속 쓸 것 같다. 다 쓰지 않으면 쓸모의 여부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몸이 나아지곤 있지만 아직 충분히 나은 것은 아니라서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제한적이다. 그래서 마음이 더 조급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 동안 뭔가를 어느 정도는 하고 싶다. 하지만 지난 며칠간 나는 겨우 나의 지난 일기장을 다시 찾아 읽거나, 작년에 써놓은 글을 타이핑하고 뒷부분을 다 지우고, 의식의 흐름으로 아무 말이나 적고, 노트를 펼쳐선 또 다른 주제에 대해 끄적이는 것밖에 하지 않았다. 정확히 뭔가를 어느 정도 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냥 많은 종이 더미 옆에서 시간을 보냈다.
『쓰기의 감각』 을 뒤적이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한 걸음 나아가, 우리가 무엇을 써야 할지를 깨닫기 위해서도 실패는 필수다.
며칠간 썼던 글의 조각들이 다 형편없이 여겨진 것을 생각하면 나는 내가 써야 할 것이 그것들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게 된 것 같다. 필수적인 실패였다. 내가 건드린 모든 주제에 대해 다른 언어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지나간 건 지나간 대로 그냥 버리자. 형편없는 초고가 지나가야 읽을 수 있는 글이 나오게 된다고도 말했잖아? (앤 라모트) 나에게 형편없는 초고가 얼마나 많이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간다. 네가 남나 내가 남나 결국 내가 남겠지.
다시 아침이 밝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일단 짧은 글 한 편을 완성하는 거야. 그게 오늘은 아닐지라도, 매일 아침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거면 된다.
(역설적으로 이 짧은 글 한 편은 완성했다. 근데 써야 할 글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숨 들이 마시고 내쉬기. 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