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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 May 11. 2022

저는 제 인생의 엉켜버린 목걸이를 풀고 있어요

친애하는 윤에게


오늘 윤의 편지와 노트가 도착했어요. 저는 편지를 꺼내자마자 그대로 멈춰 서지 않을 수 없었어요. 맞아요, 윤. 우울하지 않은데 불면증이 있을 수 없어요. 그리고 오래 아픈데 우울하지 않을 수도 없어요. 저는 오래 아파서 우울하고 불면증도 있어요.


사실 순서를 굳이 바로잡아본다면 일을 하면서 우울과 불안이 생겨 불면증이 먼저 왔고, 아마 그 우울과 화가 몸의 병이 된 것 같다는데 몸이 이렇게 오래 아프게 되니 학교를 제 인생에서 제거했는데도 우울과 불안, 불면이 남아 있어요.


당연하게도 전 이제 학교 때문에 우울하진 않아요. 그러니 제 우울은 분명히 일정 부분 사라지긴 했는데 이젠 다른 것이 자리를 잡아버렸어요.


오래 아프다 보니 무력감이랄까 그런 것들이 쌓여서, 오래 아픈 이들이 어쩔 수 없이 빠져들게 되는 우울의 블랙홀 같은 것이 생긴 상태예요. 남편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산책도 이제 하루에 삼십 분이나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한가롭게 푸릇한 식물도 돌보지만 그 블랙홀이 사라지진 않아요. 고작 잠시 잊을 수 있는 정도랄까요.


몸이 완전히 나아지기 전까진 그 블랙홀은 계속 남아있을 것 같아요. 그게 언제가 될진 저도 모르겠지만 그냥 열심히 걸어가고만 있어요. 언젠간 끝에 닿겠지, 하면서 말이에요. 그렇게 점점 몸이 나아지면 블랙홀의 크기도 점점 줄어들고, 종국엔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래도 우울의 블랙홀이 있던 자리는 꽤나 커서 흔적을 남길 것만 같은데, 전 제가 완전히 나아지더라도 오래 아픈 사람을 마주하거나 비슷한 이야기를 만나게 되면 왠지 마음이 조금은 저릿할 것 같아요. 흔적도 없던 듯 사라지기엔 꽤 오랜 기간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라서요.


그런데 이렇게 제가 우울하진 않은지 마음은 괜찮은 건지 누군가 따뜻한 말을 건네주는 게 별로 없는 일이라, 전 윤의 편지를 읽자마자 엉엉 울고 말았어요. 저 우울증 맞나 봐요, 원래 눈물이 많긴 하지만 이건 너무 우울증 눈물이었어요. 시간이 오래되니 보통 눈물과 아닌 눈물도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거, 혹시 아세요?



윤의 애인분이 지나치게 밝은 상태를 유지하려는 게 오히려 걱정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저를 생각하셨다는 문장이 다음에 바로 붙어있어 저는 울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전 아주 다행이게도 한없이 밝다가도 아프거나, 글이 뜻대로 풀리지 않거나, 편두통 발작이 찾아오거나, 재활이 너무 오래 걸려 지치고 힘들면 너무 대놓고 풀이 죽고 우울해져 버려요.


지난주에 운동을 갔을 때도 죽을상을 하고 ‘요새 좀 우울해요’라고 말했더니 재활선생님이 ‘맨날 밝으면 그게 더 문제 아니에요?’라고 해줘서 그대로 쭉 우울할 수 있었어요. B선생님은 본인의 경험 때문에 오래 아프면 정신이 아프게 되는 걸 너무 잘 아는 분이라 제가 풀이 죽어 있는 것도 대체로 잘 이해해주시는 편이에요.


전 요새 정기적으로 꼭 보는 사람이 남편과 B선생님 밖에 없는데 남편에게 모든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일주일에 두 번 만나는 B선생님에게도 애써 밝은 척하려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저의 우울을 내보일 수 있는 사람들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B선생님은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편인데, 오래 아프면 정신병에 걸린다고 말해요. 정신병이라는 말에 흠칫할 수도 있지만 사실 맞는 말이긴 하거든요. 비단 우울증뿐만 아니라 강박이라던가 불안 같은 것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오래 아프면요.




저는 올해로 아픈지 만 4년이 되었어요. 벌써 5년째네요.

학교 때문에 받았던 정신적 스트레스를 모두 제거하면 마냥 가벼워질 줄 알았는데 제가 원하지 않는 삶에서 벗어나기까지 저는 이미 오래 아프고 있어서 우울증이 먹이를 달리해 계속 자라나고 있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원치 않는 일을 하며 마음과 몸이 아팠다는 걸 깨닫고 그 일을 인생에서 덜어냈을 땐 이미 오래 아픈 사람들이 빠져드는 우울의 블랙홀에 들어선 후였던 거예요.


저는 아픈 이후의 제 인생이 손댈 수 없이 마구 엉켜버린 목걸이 뭉치 같아요. 풀려고 할수록 매듭이 더 단단해져 버려 결국 답이 없어진 서랍 속 오래된 목걸이 뭉치 말이에요. 설상가상으로 보관함 속에서 세 개가 한꺼번에 엉켜버린 골치 덩어리 말이죠. 저의 지난 4년은 마치 그런 목걸이 같았어요.


오래도록 맞지 않았던 직업, 그 직업에서 온 정신적 스트레스, 정신적 스트레스가 만들어 낸 몸의 병, 몸의 병에 기여한 평생에 걸친 나쁜 자세, 저의 기질과 태도, 오랜 우울과 불안, 오래 아파 기한이 연장돼버린 우울증, 이 모든 게 엉망으로 마구 엉켜버린 것 같았어요. 엉킨 목걸이라는 게 그냥 한 바퀴만 돌리면 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저의 문제도 각자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가 되어 도저히 분리할 수 없게 단단히 묶여 있었어요. 목걸이 세 개를 한 통 안에 둔 것뿐인데 왜 이렇게 빠져나갈 작은 틈도 없이 묶여 버린 건지 알 수가 없었어요.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요? 제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요?


하지만 풀기 시작하면 엉키기 시작한 지점이 무엇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전 결국 그걸 알게 됐어요. 제 인생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궁금했는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 그거 하나만 알게 됐어요. 그저 지금 엉킨 이 매듭을 푸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을요.


처음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요. 더 엉키고 아파지기만 한 채 2년이 가버렸죠. 제가 비로소 매듭을 풀 수 있게 된 것은 글을 쓰기 시작한 다음부터였어요. 제 이야기를 쓰면서 저는 그제야 목걸이를 풀 방법을 조금씩 알게 되었던 것 같아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꽉 막혀버린 매듭을 본 적이 있으세요? 오래된 목걸이 뭉치엔 그런 최악의 매듭이 하나쯤 있기 마련인데, 그런 매듭이 하나 떡하니 자리 잡고 있으면 다른 작은 것들은 풀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걸 풀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거예요.


저에게 그걸 풀어내는 방법은 학교를 그만두는 것이었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엉망으로 엉켜버린 부분을 부단한 시도와 노력 끝에 결국 제 손으로 풀어냈어요. 끊거나 버려버리지 않고 목걸이 풀기를 포기하지 않길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 인생을, 포기하지 않은 거죠.


그리고 그 후 저는 비로소 다음 관문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됐어요. 재활운동을 가고, 평생 쓰던 몸의 자세를 고치고, 편두통을 치료하고, 취침 전 약을 매일 챙겨 먹고, 여전히 글을 쓰고, 산책 시간을 조금씩 늘려가면서 저는 제 인생의 남은 매듭들을 풀고 있는 중입니다. 짧은 시간에 뚝딱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쉬운 문제는 아니지만 답이 없는 일은 아니기에 시간을 두고 조금씩 차근차근 풀어나가고 있어요.


목걸이 풀기는 그런 거거든요. 가장 지독한 매듭 하나만 일단 해결하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해볼 수 있어요. 저는 그걸 해냈기 때문에 나머지 매듭들도 결국엔 다 풀어낼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아직 끝까지 가보지 않아 확신은 할 수 없지만 확신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풀기 시작했다면 완전히 다 푸는 건 시간의 문제예요. 전 저에게 그저 충분한 시간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를 그만두면 아무 걱정도 없을 것 같았지만 이미 오래 아픈 이의 우울의 블랙홀에 빠져들었던 것처럼, 저에겐 시간이 필요해요. 몸과 마음이 아파지지 않는 방법을 알고는 있지만 그 둘은 아주 오랫동안 아파왔고, 서로가 서로를 끄집어 내리기도 해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에는 조금 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뿐이에요.


아, 혹시 실제로 엉킨 목걸이를 풀어보신 적이 있나요? 전 몇 달 전에 정말 엄청난 목걸이 뭉치를 푼 적이 있는데요, 처음엔 정말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아서 그대로 버려버릴까 했어요. 그러다 오기가 생겨서 바늘로 여기저기 마구 찌르다가 몇 시간 만에 겨우 풀어냈는데 가장 어려운 걸 풀고 나니까 신기하게도 나머지 매듭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더라고요. 첫 번째 매듭 이후론 마치 해답지가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쓱쓱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다 풀 수 있었어요.


그렇게 저는 제 인생의 목걸이를 열심히 풀고 있는 중입니다. 다 풀면, 우리가 정말 실제로 만날 수 있겠네요. 제가 윤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는 날, 꼭 만나기로 해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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