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ver.
서른셋 어느 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이전처럼 살 수 없게 되었다. 이전해 여름 오른쪽 뒷목의 한 지점에서 시작됐던 통증이 어느새 온몸으로 걷잡을 수 없게 퍼졌고,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아졌다. 수많은 검사 끝에 내가 받아 든 진단명은 섬유근육통이었다.
이 글은 통증의 시간을 해독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통증과 함께 이어진 병가, 휴직, 휴직의 연장 그리고 퇴직까지. 사람들에게 지난 시간의 나는 단지 아픈 사람일 뿐이었다. 나의 시간은 아팠다는 말 하나로 성에가 낀 유리창처럼 뿌옇게 희미해졌다. 뽀득뽀득. 나는 그 유리창을 닦아본다. 뿌옇고 희미한 것, 이건 나의 시간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나는 내 시간에 의미를 찾아주고 싶다. 엄마는 내가 몇 년째 ‘부재중’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난 어디에도 간 적이 없었다. 나 여기 있다고, 여기서 절대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 투쟁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건강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의 그 시간들이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간 것은 아니라고. 하루에 단 10분을 산책하는 날도, 혹은 아예 바깥에 나가지 못하는 날도 나는 더 나아지기 위한 마음을 단 한 순간도 놓은 적이 없다고.
기록되지 않은 서사는 납작해진다. 아픈 사람은 말 그대로 아픔과 싸우느라 기록을 남길 에너지가 부족하고, 그저 타인의 안타까움이나 동정이 담긴 몇 마디의 언어만이 스쳐 지나가므로 질병의 시간은 보통 납작하게 남는다.
그렇게 나 또한 통증의 기록을 남기는 것에 여러 번 실패했다. 수차례 노트북을 열었으나 고정된 자세가 유발하는 근육의 경직감과 통증을 참을 수가 없어 길어야 삼십 여분쯤 버티고 글쓰기를 중단하기 일쑤였다. 글씨를 쓰면 팔과 어깨와 등이 아팠다.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자세는 없었다. 아니, 사실 통증이 시작된 이후 나는 단 하루도 통증과 함께이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들 나에게 어디가 아픈 것이냐 물었다. 언제쯤 나아지는지, 다시 일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복직하면 괜찮을 수 있는 것인지 물었다. 그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은 나도 가장 알고 싶은 것들이었다.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시간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쓰기로 했다. 내가 무의미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가족들에게,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은유 작가는 《쓰기의 말들》에서 ‘써야 알고 알아야 나아지고 나아지면 좋아지고 좋아지면 안심한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문장을 여러 번 베껴 적으며 이렇게 글을 써서 종국에 내가 안심할 수 있게 된다면 글을 몇 백 번이고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글을 썼다. 글을 쓰자 나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글이 반복적으로 가리키는 지점을 발견했고 자연스럽게 통증이 어느 시기마다 나에게 찾아왔는지 알게 되었다. 좋아지면 안심할 수 있다고 했던가. 나는 안심하고 용감해져 학교를 그만둘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통증의 종결을 의미하진 않았지만 앞으로 올 고통을 차단하고 오직 회복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유리창을 마저 닦는다. 나와 비슷한 모습을 한 사람들을 발견한다. 내 시간의 의미를 찾기 위해 시작된 글이었지만 처음부터 나만을 위해 쓴 글은 아니었다.
아프기 시작한 후 내내 나는 실제 통증환자, 섬유근육통 환자들의 글을 찾아 헤맸다. 인터넷 환우회에 가입해 많은 글들을 읽었지만, 그것으론 충분치 않았다. 병원이나 약, 증상 등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 말고도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대체 이런 통증을 가지고 계속 사는 게 가능하긴 한지 미치도록 궁금했다. 온전히 책 한 권의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투병기를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거의 모든 투병기는 극적인 호전이나 여지가 없는 결말, 죽음으로 수렴했다. 무엇이 됐든 끝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와 동시에 나와 같은 사례를 왜 책 속에서 찾을 수 없는지 말하지 않아도 너무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낫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이런 불치성/난치성 만성질환은, 서사로서 매력이 전혀 없었다. 극적이지도 않고, 끝도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이 글을 써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오랫동안 혼자 아픈 시간은 외로운 경험이었지만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쌓였다. 부서지고 무너지며 좌절하고 다시 일어나길 반복하는 시간은 지난하고 괴로웠지만 결국 포기하지 않아 터널 끝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빛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먼저 비슷한 경험을 한 이의 글을 읽을 수 있었다면 덜 외로웠을 것이다. 길고 까마득한 터널이지만 그 끝에 빛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용기를 가지기 더 쉬웠을 것이다. 통증 때문에 글을 쓸 엄두도 내지 못할 많은 사람들에게 이 글이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의 글에서 당신의 경험을 발견하고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
병원과 병원을 오가며 많이 다치고 외로웠을 쓸쓸한 당신의 마음을 내가 정말 잘 안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어딘가에 있을 나와 비슷한 당신들에게 손을 내민다. 더 이상 외로워하지 말라고. 이 글은 나와 당신을 위한 글이다.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당신에게 위로가 될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