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에 과거의 오늘이라며 가족 여행 사진이 떴다. 마지막 가족 여행이었던 오키나와 여행이었다. 여름이라 통증이 조금 잦아들었고 아팠던 첫 해라 아직 체력이 남아있어 가능했던 여행이었다. 웃고, 걷고, 말하는 내가 사진에 담겨 있었다. 사진을 보니 여행 다니던 때가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느껴졌다.
여행지에 도착해선 다른 때보다 쉽게 지쳤고 자주 쉬어야 했다. 하루 일정을 끝내고 오면 온몸이 저리고 등이 타들어 갈 것 같았지만 온 가족이 휴가 날짜를 맞춰 온 여행이라 혼자서만 숙소에서 쉬겠다고 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날 쯤엔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무거운 몸을 이끌고 숙소를 나섰다. 오늘 하루만 버티면 될 테니까. 그날은 시내 구경을 했는데 유난히 많이 걸어 숙소로 돌아오는 길엔 길바닥에 주저앉고 싶을 정도였다. 겨우겨우 숙소로 돌아온 후엔 돈키호테에서 산 진통 스프레이를 목과 어깨, 등 전체에 분사하곤 장렬히 전사했다. 마지막 밤이었지만 맥주는 마실 수 없었다.
그때는 여행 내내 참 힘들었다고만 생각했는데 휴대폰이 띄워준 과거의 오늘을 보니 나는 웃고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서, 초록 잔디 위에서, 때론 햇살에 찡그리기도 했지만 나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이동과 통증이 힘들 뿐 끝도 없이 펼쳐지는 바다를 보는 것,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니 여행을 같이 온 것만으로도 참 좋았다. 나는 더위와 통증에 지쳐 빨리 숙소에 가서 쉬길 원하는 막내딸이었지만 그래도 일정을 따라갈 수 있었고 여행을 끝마칠 수 있었다. 지금으로선 그마저도 상상도 할 수 없으니 그때의 나는 그나마 건강했던 편이었다.
내가 아픈데 내 사정은 봐주지도 않고 여행 계획을 짠다며 툴툴거렸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여행은 나의 그나마 덜 아팠던 마지막 여행으로 남았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가족여행이 되었다.
나는 여행을 많이 다니던 사람이었다. 방학 때면 주로 짐을 꾸렸다. 단수 여권에서 복수 여권으로, 그러다 결국 10년짜리 여권을 발급받았다. 자주 돌아다녔기에 아프고 난 후 어느 곳도 쉽게 가지 못하는 내 모습에 좌절했다. 나는 항상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시간이나 돈이 문제가 된 적은 있지만 나의 몸 자체가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시간도 돈도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데 나의 몸 하나만 문제가 되는 상태가 되자 나는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내가 이미 가져봤던 것, 하지만 다시는 돌려받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과 갈망이었다.
나는 아직도 예전에 여행 갔을 때 이야기를 자주 꺼낸다. 내가 뉴욕에 갔을 때, 내가 파리에 있을 때, 내가 샌디에고에 있을 때, 같은 구절로 무수한 문장을 시작한다. 여름의 시원한 한 줄기 바람을 맞으면 뉴욕의 허드슨 강변 공원에 앉아 크리셋 미셜의 공연을 보던 때가 떠오르고 어디선가 에펠탑을 보면 유람선을 타고 센강을 돌며 바라봤던 반짝거리던 파리의 밤이 생각난다. 지금도 어떤 노래를 들으면 금세 샌디에고 한 공원의 큰 나무 밑에 누워 그 노래를 듣던 십 년 전 장면으로 돌아간다. 여행 갔던 일들이 모두 전생 같다. 내가 겪었으나 이번 생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될 만큼 지금의 나와는 멀게 느껴진다. 그렇게 걷고 뛰고 비행기를 탈 수 있는 나는 지금 없다. 사라진 지 오래다.
인생의 강렬한 기억은 보통 강렬한 사건에서 생성된다. 여행이 유독 기억 속에 잘 박히는 건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곳을 떠나온 지 아주 오래되었는데도 나는 아직도 프랑스 몬트모린 어느 시골 산자락 성벽, 샌디에고의 야자수가 가득했던 거리와 파란 하늘, 브루클린 브리지를 건너가며 마주한 눈부실 듯 아름다웠던 야경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마음만 먹으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몇 년 전까진, 마음만 먹으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직업도 있었고 시간도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수행할 수 있는 몸을 잃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 해외여행이었던 신혼여행에선 통증이 너무 심해 하루에 하나의 일정만 소화하곤 거의 앓아누웠다. 마지막으로 열세 시간의 비행을 끝내고 공항에 도착했을 땐 몸이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때를 마지막으로 나의 여행은 끝이 났다.
해외여행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국내 이동도 자유롭지 않아 졌다. 고정된 자세로 오랜 시간 앉아 있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집에서 세 시간 정도 걸리는 나의 고향집에는 신혼여행이 끝난 후 한 번 다녀오곤 몇 년간 한 번도 가지 못했다. 목과 어깨와 등이 부서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장거리 이동의 통증은 하룻밤 자는 것으로도 금방 회복되지 않고 며칠을 앓게 했다. 나는 다시 장거리 이동을 시도해보지 않게 되었다.
방학이면 이곳저곳으로 훌쩍 떠나곤 했다. 외국의 낯선 거리를 거니는 내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몇 년째 아파트 단지 주변만 걷는 내 모습은 확실히 낯설다.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이다. 방학마다 해외여행만 다녔던 것은 아니다. 음악을 시작하고 나선 내 공연을 하는 게 가장 우선순위라 방학 때도 여행을 가지 않았다. 그땐 커다란 기타 가방을 메고 공연장을 누비며 살았다. 해외든 국내든 나의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아프기 전까지는 그랬다.
한동안 남편과 나는 밥을 먹을 때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종종 보곤 했다. 내가 가보았던 곳도, 가고 싶은 곳도 집안에 앉아 가볼 수 있었다. 가봤던 곳을 다시 보는 것은 반갑고 가보지 않은 곳을 보는 것은 설레는 일이었다. 어느 날은 영상을 보다 남편에게 말했다.
‘어보, 난 예전엔 다시 여행을 못 가는 게 너무 아쉬웠는데, 이젠 괜찮은 것 같아. 내가 갈 수 있을 때 가봐서 다행인 것 같아. 그걸로 된 것 같아.’
통증 초반에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던 나는 자유로운 몸을 잃은 것에 깊은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픈 몸에 적응하고 아프기 전의 몸과 점점 더 멀어지면서 나는 잃은 것에서도 멀어질 수 있었다. 여행 영상을 보면서도 그리움이나 좌절감에 울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그저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아직 건강하게 세상을 누빌 수 있었을 때 많은 곳에 가보아서 참 다행이다. 추억이 있어 다행이다. 페이스북에서 자꾸 나의 11년 전, 7년 전, 5년 전 사진을 보여줘서 다행이다. 그때의 아프지 않던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참 다행이다.
여행은 나의 큰 꿈 리스트에도 없다. 내가 몸이 나아지게 된대도 내가 하고 싶은 최대치의 일은 국내에서 일박이일 정도 여행을 하거나 서울에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러 가는 일 정도다. 여행에 대한 꿈은 일찌감치 접었다. 여행은 몸 전체가 조화롭게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때 가능한 종합예술과 같은 일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로서는 그런 몸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여행을 갔다 온다면 여행 후유증으로 일주일은 앓아누울 것 같은데 그러지 않을 정도로 몸이 나아질 상태가 될 거라는 확신이 지금은 없다. 여행은 너무 위험부담이 큰 일이다. 그래서 여행은 전생의 기억으로만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 마지막 가족여행에서 사 온 고래상어 인형은 거의 매일 나의 독서 생활을 함께해주고 있다. 꽤 괜찮은 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