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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표심 Nov 22. 2022

[말이 필요해] 이래서 결혼할 수 있어?

너에겐 어떤 언어가 있는데

1. 아는 게 쥐뿔도 없다


  "나,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 때 어떻게 여자와 연애를 하는 것인지 걱정이 됐다.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할 말이 없으니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니 여학생과 무슨 데이트.


  고1 때 친구 따라 신광 여고생과 롯데리아에서 단체 미팅을 했을 때, 할 말도 재미도 없었지. 예쁜 여학생이 안 나와서였나?


  1학년 겨울방학 때는 진명여고 전교 1등이라는 여학생과 소개팅을 했다. 금기를 깨고 짜장면을 먹었다. 서로 할 말이 없어 호구조사만 하고 끝났다. 할 말이 없는 상황. 재미라고는 개미 눈물만큼도 없는 현실. 같이 어떻게 앉아 있었는지 진땀을 뺐다. 도대체 뭘 하며 여학생과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1]


  내 앞날이 걱정됐다. 할 말이 없는 나. 예쁜 여자나 귀여운 여자를 만난 들 무슨 말을 한단 말이야? ( 자표심의 여자 분류법 : 이 세상에는 '예쁜 여자'와 '귀여운 여자' 두 종류가 있다. ) 문학책이라도 읽어야지. 그럼 할 말이 생길지도 몰라.


  고모댁 사촌누나 책꽂이에서 발견한 셰익스피어 책. TV 올리비아 핫세의 그 눈망울이 떠올랐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가면 무도회장에서 서로 했던 말.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좌절했다. [2] 남녀가 사귀려면 저런 말을 해야 하나 본데 나는 이게 뭐야.




  누나 책꽂이의 그 책을 들춰보는데,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과 똑같은 대화가 있었다. 영화 대본 같았다. 나를 절망케 했던 그 사랑의 언어들이 그 책에 있었다. 넋을 잃고 보고 들었던 그 시적인 표현들. [2] 내가 그냥 보통 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책들. 머리를 벽에 처박으며 원망케 했던 그 말들. 꿀처럼 향기로운 말이 담긴 책을 읽으면 올리비아 핫세 같은 요정을 사귈 수 있을까?


"나의 천한 손이

이 거룩한 자리를 더럽혔다면,

그 보상으로 두 사람의 순례자처럼,

부드러운 입맞춤으로

그 더러움을 씻어 드리리다. Kiss."

-로미오-



2. 나는 결혼하기도 어렵겠다


  누나에게서 받아온 책에는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인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가 있었다. 읽으면서 가슴을 쳤다. 나는 영원히 이런 말을 할 수 없구나. 나는 여자 친구와 사귈 수 없구나. 나는 결혼할 수 없겠구나. 나에겐 말이 없구나.


  그 당시 이 세상 여학생들은 모두 문학소녀라 생각했었다. 중고 모두 얼굴 시커먼 남학교만 다녔으니. 미팅 외에는 한 번도 대화다운 대화를 해 보지 못했다. 여학생들이 재미없는 나와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호구조사 외에도 할 말이 있어야 하는데. 선생님 뒷담화 말고도 할 말이 있어야 하는데.


  할 말이 없었지만, 나는 끊임없이 여자를 탐구하려 했다. 결혼이 내 인생 최대의 목표였으니까.


  고2 때는 인천 숭의감리교회 여자 전도사님 동생 영신이랑 교회 같은 반이었다. 그녀는 나와 같은 인천 연안부두에 있는 아파트에 살았다. 키도 크고 깨끗한 얼굴에 조용하고 얼굴은 계란형이었다. 일요일 비가 오는 날 서로 교회 가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나 내가 우산을 씌워주었다.


  함께 우산 하나를 받치고, 둘이 같이 걷는 길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었다. 죽음의 길은 아니었다. 심장은 온몸으로 기쁨의 피를 쿵쿵 쿵쿵 몰아넣었다. 입가엔 미소가 돌았고, 내 얼굴은 뽀얗게 변했다.   


  신이시여~ 나에게도 이런 행운이. 빗속의 여인과 함께 하다니. 이 순간을 영원히.



3. 결혼은 해보고 죽자


  "오늘 롯데백화점에 갈려는데 같이 갈래?" 내가 말을 꺼냈다.
  "그럴까?" 그녀가 허락했다.

  "앗싸 아~" 속으로만.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기적이 미러클이. 바람이 불고 있도다. 홍해가 갈라지고 있도다. 신이시여! 제게도 이런 기회를 주신단 말입니까? 이런 죄인에게도 사랑의 은총을 내리시다니. 하느님은 살아계시도다.


  한 번 던진 말에 그녀가 반응을 했다. 오케이 싸인이 떨어졌다. 역시 말은 던져야 한다. 가만있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 거야.


  같이 서울행 전철을 탔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에 없다. 내 기억에 그녀와의 대화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롯데 백화점에 도착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 층으로 위층으로 올라갔다가, 아래층으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전철을 타고 같이 집에 왔다.


  별 말도 없었다.


  이런 바보 같은~ 내 속에 무슨 말이 있어야 그녀와 얘기를 하지. 그냥 벙어리. 얼굴만 뜯어보고 있을 수도 없고. 개탄할 일이었다. 좌절 삼매경에 들었다.


  그 후 고등학교 축제인 은행제에도 영신이와 그녀 친구를 초대했다. 밴드부 앞에 위치한 칠쟁이 미술반의 그림도 함께 감상했다. 그리곤 또 필름이 끊어졌다. 더 이상 기억이 없는 걸로 봐서, 또 말에 한계가 왔던 것이 분명하다.


  고교시절까지의 커다란 고민은 할 '말'이 없다는 것. Words don't come easy to me.

  이유는?

  교과서 외에 아는 게 없다. 이래서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머리만 쥐어박았다.


  학력고사가 끝나면 책을 보자고 다짐했다. 대학교에 가면 책이란 걸 읽어 보리라. 결혼은 해 보고 죽자.



Words don't come easy to me.(F.R. David)

말이 쉽게 오지 않아.

F.R. David - Words don't come easy




4. 독후감 쓰기 힘들다


  대학교 1학년 국어 숙제로 강제로 책을 읽게 됐다. 매주 한국 단편소설을 읽고 독후감을 원고지에 써내야 하는데, 소설과 담을 쌓은 나는 쉽지 않았다. 월요일까지 원고를 제출해야 하니 토 · 일요일에 김동리의 소설 '감자'를 한 번 읽고는, 원고지를 앞에 두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독후감이 도대체 뭐야? 감상문? 그럼 참 좋았다고 써야 하나? 감이 잡히질 않았다. 토요일 몇 시간을 끄적이며 고민하다가 일요일로 넘겼다. 몇 자 적어보고 또 몇 시간을 고민하다 말을 중복하거나 길게 늘여서 원고지 장수를 맞춰 제출했다.


  한심했다. 그다음 주에도 또 써야 하니.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다가 결심을 했다. 책을 한 번 이상 읽어 본 적이 없던 나였지. 단편 소설이니 몇 번 더 읽어 보자. 4번 읽으니 이야기 흐름이 보이고 스토리가 기억났다. 6~7번째 읽으니 드디어 할 말이 생각났다. 신기했다.


    어찌 된 거지?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으니, 흐름 파악이 되고, 할 말이 생기네. 내용을 알고 나서도 반복 읽기를 하면, 뇌가 자유를 얻어 스스로 할 말을 하나 보다.



5. 독후감 쓰기 쉽다


  여러 번 읽어 익숙해진 문장을 또 읽으면, 내용 파악에 매달리지 않아, 나름 딴생각이 드는 비판적 읽기가 되었다. 저술된 시대와  현시대가 비교도 되었다. 주인공이 꼭 그래야만 했나 하는 의문점도 생겼다. 이 것 저 것 할 말이 생겼다.


  뇌에 선명하게 각인된 지식은 또 다른 생각을 불러온다. 이때부터는 옹아리가 가능하다.


  옹아리가 가능하면 자신감이 조금 붙는다. 그 자신감으로 대학교 4학년 때 꿈에 그리던 예쁜 여학생을 만났다. 내 속에 말들이 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얼마 후 나는 대학원에 들어가 '국제경영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때 감열지에 인쇄가 돼 나오는 워드 프로세서를 학과실에서 처음 보았다. 얼마 후 286 컴퓨터를 할부로 구매하고, 아래아 한글과 테트리스를 깔았다. 브라운관 화면은 흑백이었다.


  가끔 학교 앞 샘 분식에서 그녀와 만나 삼치 백반을 먹었다. 그녀는 태능까지 등하교 거리가 너무 멀고, 미술 작품 만드느라 시간이 없다고 했다. 교양과목 기말 시험으로 리포트를 내야 하는데 걱정이라고 했다.


  "책 읽고 기말 리포트를 내야 하는데 걱정이에요"
  "그래? 내가 써 줄게요. 가져와 봐"


   다음 주에 그녀가 소설책 <장미의 이름>을 가져왔다. 이탈리아 수도원 살인사건으로 시작되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이었다. 900페이지나 되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말없이 구름만 지났다. 이 어려운 소설을 어떻게 읽고 리포트를 쓰나. 걱정이 되었다. 등장인물 이름이나 헷갈리지 말아야 할 텐데. 벌써 상상 속 식은땀이 났다.

  한 번 읽었다. 역시 뭘 어떻게 써야 할지 깜깜했다. 한 번 더 읽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900 페이지나 되잖아. 이를 악물고 한 번 더 읽으니 조금  나아졌다. 세 번을 읽을 수는 없었다.



6. 여신과 결혼에 성공했는데


  이 긴 머리 예쁜 그녀를 위해 못할게 뭐냐? 그냥 이 것 저 것 주워들은 말들을 조금씩 섞었다. 쓰고 나서 읽어봤다. 무슨 철학적인 단어들이 들어있었다. '~적'이란 말도 가끔 끼어들어 있었다. 내가 봐도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그럼 됐다.


  남들은 원고지에 볼펜으로 리포트를 써서 제출하겠지. 나는 아래아 한글로 편집하고 A4로 인쇄해 12장짜리 리포트를 그녀에게 전달했다. A+학점을 받았다고 했다.


  논픽션 단행본은 여러 번 읽어야 내 것이 된다. 싫으면 읽은 것을 남에게 가르쳐주어야 내 것이 된다. 같은 카테고리의 책을 여러 권 읽으면 견해가 생긴다. 더욱 세밀한 한 가지 주제로 20권 이상 읽으면, 그 분야의 논문을 쓸 준비도 된다. 내가 이렇게 한 적이 있던가.


  어떻게든 뇌 속에 말들이 넘쳐나야 한다.

  인풋(in-put)이 많으면 양동이에 물이 넘칠 때가 올 것이다.


  할 말은 이렇게 많아진다.

  실제 입으로 말을 뱉지 않아도, 뇌 속에 말들이 많은 게 좋다.


  결국 그 여신과의 결혼에 성공했다.



ps

관찰해 보면, 굳이 책을 많이 안 읽어도 50대가 되면 사람들은 할 말이 많다.

나도 그렇다.


그래서 입을 다물어야 한다.

여신의 저주가 내릴지도 모른다.


< 참고 자료 >

[1] 고1, 미팅. 예쁘냐 귀여우냐, 나의 추억 묵상법, 자표심 브런치


[2] 로미오와 줄리엣 1968년도 작품 중 "What is a youth"의 장면

2분50초부터 사랑의 대화가 나온다


로미오와 줄리엣 "What is a youth"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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