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2가 되었고, 나는 테너 색소폰에서 트럼펫으로 바꾸었다. 색소폰 소리가 싫어졌기 때문이다.
1학년 연습실에서 합주할 때, 내 테너 색소폰 근처에 녹음기를 놓고 합주를 녹음해 보았다. 허스키한 색소폰 소리가 크게 들리니, 다른 금관악기와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테너 색소폰과 작별하기로 했다.
색소폰은 마우스 피스에 꽂은 리드를 바르르 떨어 소리를 낸다. 리드는 대나무를 얇게 깎아 만들었고 이 대나무 편이 진동하면서 바람이 금관으로 몰려들어가면 세미한 끓는 소리가 난다. 밤무대를 연상케 하는 색소폰을 멀리하기로 했다. 나는 맑은 사람이니까.
트럼펫으로 주 종목을 옮겼다. 트럼펫 파트가 약해서 도와줘야 하기도 했고.
트럼펫은 연주하기가 배나 힘들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멜로디를 담당했다. 색소폰은 조연이고 트럼펫은 주연이었다. 소리 내는 메커니즘도 신기했다. 트럼펫이 나아 보였고 나는 미련 없이 테너 색소폰을 떠났다. 헤어질 결심을 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듯이.
2. 트럼펫 사랑
트럼펫에 대한 호기심은 중학교 때부터 있었다. 대림동 양문장로교회에서 트럼펫 연주를 보았기 때문이다. 신림중학교 3학년 학생회장 형이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트럼펫 연주를 했다. 힘겨워 보였다. 한 곡을 끝까지 이어가질 못했다.
얼마나 많은 삑사리(음이탈)가 났는지 모른다. 피아노가 앞으로 나가질 못했다. 그런 실력으로 중등부 예배시간에 특송을 하겠다니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때 본 트럼펫. 피스톤 3개만 있는데 어떻게 모든 음을 연주하는 건지 신기했다.
트럼펫은 색소폰처럼 대나무 리드를 진동시켜 소리를 내지 않는다.
내 신체인 입술을 뿌~ 진동시켜야 한다. 입 주위 근육을 활용하여, 입술의 모양과 바람의 세기를 조절해서 바람의 속도를 맞춰야 하고 입술의 진동에 적응해야 한다. 눈에 힘을 주고 목과 입근육이 긴장해야 한다. 많은 연습을 통해, 입가 근육을 단련해야 겨우 소리가 난다. 입술을 혹사하게 된다. 입술엔 마우스 피스에 눌린 자국도 생긴다. 입술이 얼얼하고 통증도 생긴다.
피스톤 3개만으로 소리를 내야 하기 때문에, 음이탈 위험으로 항상 조마조마하다.
좌측 : 테너 색소폰 대나무 리드 / 우측 : 웃음을 잃은 테너 색소폰의 자표심
3. 트럼펫 연주의 고통
행진곡을 연주하다 쉬는 부분이 나오면, 입을 벌리고 입술을 상하좌우로 돌리면서 입근육을 풀어준다. 트럼펫을 좌우로 잡고 세게 흔들어 침을 뺀다. 긴장 속에서 다음 트럼펫 파트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속으로 기도하면서.
지금도 음악회에서 트럼펫 독주가 나오면, 나는 손에 땀을 쥔다.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간다. 삑사리가 나지 않고, 무사히 곡을 마치면 연주자에게 마음속 박수를 보낸다. 트럼펫 연주자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언제나 안쓰럽다.
고2 여름방학 트럼펫 연습을 한참 하는데, 졸업한 반갑지 않은 밴드부 선배가 왔다. '선배창'을 아느냐고 했다. 그게 뭔지 몰랐다고 3학년 악장 선배를 각목으로 엉덩이를 후려갈겼다.
선배에게 맞은 3학년 악장은 우리 2학년을 몸뚱이 찜질해야 했다. 얻어맞은 우리는 선배창을, 생전 처음 들어보는 선배창을 줄 서서 따라 외쳤다.
4. 하나님 염라대왕과 동격이라니
"선배창~"
"하나. 선배님은 하나님과 동격이시며
염라대왕과 친구이시다~...."
(이후는 기억 단절)"
졸업했으면 그만인 것을 양아치 선배들은 졸업 이후까지도 악마였다. 어떻게 평일날 여기를 올 수가 있지?
악마는 내 신앙을 시험했다. 선배창을 시켜서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념을 부정하도록 했다. 6.25 때 북한군 병사가 예수님 사진에 침을 뱉고 발로 밟는 자들은 살려 주고, 아닌 자들은 죽이겠다 위협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순교자가 되라는 그 이야기가 생각났다.
선배창을 따라 말하기 주저했지만, 하지 않으면, 다른 녀석들과 함께 더 많이 얻어터졌을 것이 분명했다.
내 입에서 선배를 하나님과 동격으로 만든 후로 하나님을 대할 면목이 없었다. 나는 하나님을 부인한 걸까. 하나님의 배신자가 된 기분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선배창 사건이 있기 전, 인천 모 감리교회 부흥집회에서 참회 기도하며 하나님을 가까이하려 했었는데, 이게 뭐람.
5. 탐욕스럽게 보이는 목사였지만
탐욕을 보여주는 듯 대머리가 까진 이문어(가명) 목사는 청소년을 상대로 자기 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열었다.
대머리라고 모든 사람이 다 탐욕스럽게 보이진 않는다. 당시 이문어 목사는 몸집이 크고 이마는 울퉁불퉁했다. 내장의 시커먼 탐욕이 머리로 비집고 올라와 머리털이 빠졌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가진 건 쑈맨십이 전부인 그는 양복 재킷을 머리 위로 올려 걸쳤다. 눈깔을 까 뒤집고 두 팔을 앞으로 쭉~뻗고, 짝다리를 짚고 한쪽 다리를 흔들며 깡패 흉내도 내었다.
설교에선 '여자의 맨살 다리'를 자나 깨나 상상하는 어떤 남학생의 음욕 죄 이야기를 하며 회개기도를 유도했다. 목사는 '여자 다리'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순화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참회기도를 시키니 특히 여학생들은 무릎을 꿇고, 모은 두 손을 위아래로 흔들고, 몸을 위아래로 띄우며 미친 듯이 기도했다.
6. 보이는 악마
울고 불며 기도하는 모양을 흘낏 보고는, 저렇게 해야 하나 보다 하고 조금 따라 해보기도 했다.
내가 선배창으로 괴로워했던 것은 이런 부흥집회 불도가니를 통과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고3이 되면서, 밴드부에 나가지 않았다. 공부 좀 해야 했기 때문이다. 졸업한 선배를 빼고는 나를 때릴 놈들도 없었다.
월요 조회 땐, 다른 학생들처럼 운동장에 줄을 서서 밴드부를 바라보았다. 스탠드에 앉아 연주하는 밴드부의 애국가 삑사리를 즐기면서. 행진곡 미해군가 ( Anchors Aweigh : 아래 동영상 )를 감상하면서.
3학년 여름방학 때, 선배들이 또 쳐들어 와서 각목을 들었지만, 3학년을 주축으로 더 이상 맞지 않고 맞섰다는 말을 들었다. 방학이 끝나고도 졸업한 선배들은 죽이겠다고 깡패 연장을 들고 학교를 찾아오기도 했다.
3학년들은 밴드부실을 폐쇄했다. 밴드부실 문에 각목으로 엑스자를 만들어 못질했다. 하나님과 동격이라는 당시 선배들 중에 악마들이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