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소폰 트럼펫 밴드부
"왜 가만있니?"
고1 국토지리 선생은 왜 가만있냐며 내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찰싹 쳤다. 이 분은 수업시간 중 교실 통로로 다니다가 뒤통수를 치는 것으로 시간을 때웠다.
얼굴에서 열이 나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선생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칠판에 판서도 안 했고, 설명도 없었다. 지리책 몇 군데에 줄을 그으라는 게 전부였다. 그는 자기 아내를 '어부인'이라 부르며 자랑했다.
서울대를 한 해에 162명씩 보냈던 특수고등학교 시절, 명성을 날리던 선생님들은 모두 떠나가고 두어 명 정도밖에 없었다. 우리 반 담임 선생님 같은 젊은 한 두 명을 제외하고, 선생들은 대부분 재활용 불가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전과목을 1학년 때부터 자습하는 수밖에 없었다.
학교는 졸업장만 따기 위해 폼으로 다녀야 했다.
이런 학교를 가려면, 인천 연안부두 종점에서 동인천역까지 버스를 타야 했다.
8시까지 학교 도착해야 하니, 아침 6시 30분 이전에 집에서 나갔다. 버스에 오르면, 손님이나 운전사나 한 마음으로 담배를 뻐억 뻐억 피워댔다. 운전사도 50대 남자 승객도 지구의 산소를 빠알갛게 태웠다. 나는 눈을 흘겼다.
종점이라 차는 바로 떠나지 않았고, 창문을 열었어도 코를 통과한 연기는 뇌 꼭대기로 올라가 쿡쿡 쑤셔댔다. 연기는 해골 속에서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일산화탄소와 타르 등 수천 종의 독성 화합물질이 아침부터 뇌를 지져댔다.
농축된 미세먼지 연기가 그리도 좋냐. 버스 밖에서 실 컷 처마셔라. 이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밖에 내지 못했다. 매일 속이 썩어 들어갔다.
동인천역 전철이 도착하면, 사람들은 다 열리지도 않은 문틈을 비집고 우르르 돌진했다. 나와 유건호는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지켰다. 자리가 나면 앉고 아니면 서서 흔들거렸다.
서있건 앉아있건, 오류역까지 무조건 영어자습서를 보았다. 승객 사이에 꼭 낑겨 가면서, 유건호와 별 말을 하지 않고 자습서만 보았다. 영어자습서는 두께가 있었기 때문에 칼로 사등분해서 나름 분책했다. 책 앞 뒤엔 스카치 테이프를 발라 너덜 해지지는 않았다. 건호에게는 미리 말했다.
"전철 타는 동안은 말 안 시키기로 하자"
오류역에서 내리면, 오류동을 지나 궁동 학교까지 35분을 걸어갔다. 160번 버스를 타봐야 또 압착당해 숨을 헐덕거려야 했으니까.
가끔 오류극장(梧柳劇場)을 지나 걸어갔다.
2학년 때, 이 오류극장에서 리처드 기어가 출연한 <사관과 신사>를 보기도 했다. 이 극장은 어떻게 해도 오류극장이었다. 힘들게 등교하면 매립시키기에 땅도 아까운 선생들에 시달렸다. 선생들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왜 선생을 하는지 모르는 듯했다. 스스로 선생질을 한다고 말하는 선생도 있었다.
매일 방과 후엔 밴드부실이 있는 과학관으로 갔다. 과학관 앞 풀밭 어두운 녹색 로댕상 머리는 바가지를 씌운 듯 어색했다. 밴드부 음악실은 과학관 4층 꼭대기에 있었다.
밴드부실은 넓은 연습실과 연습실 1/2 크기의 악기실로 나뉘어 있었다. 연습실에 들어서면, 눈앞 커다란 창에 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창 밖 30m 앞에 중학교 건물이 보였다. 연습할 때마다 중학교 교무실에서 귀를 막고 있어야 할 선생님들을 생각했다.
연습실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었고, 교회 장의자만 몇 줄 놓여 있었다. 바닥은 콘크리트 폴리싱 연마가 되어 종석이 드러나 반질반질했다. 관악기 발악 소리가 맨질한 면을 때린 만큼 바닥과 벽은 반발했다.
안쪽엔 통유리로 평소 속이 훤히 보이는 악기실이 있었다. 이 유리 안쪽에 커튼이 길게 달려 있었다. 악기실 끝 창문가에는 어깨끈 달린 큰북의 허연 가죽이 보였다. 그 옆 앵글 베니어합판 위엔 금속 마우스피스로 소리를 내는 금관악기들이 있었다. 황금빛 트럼펫, 트럼본, 바리톤, 수자폰 등이 나체로 올라 있었다. 귀퉁이엔 드럼과 심벌즈가 자리했다.
대나무 리드를 떨어서 소리를 내는 클라리넷, 엘토 색소폰, 테너 색소폰 등 목관악기 검은 케이스는 맨 아래 칸에 있었다. [1] 색소폰이 목관악기라는 말을 이때 처음 들었다. 믿기 힘들었다.
연습실에선 소음 레벨이 폭발했다.
합주하기 전 개별 악기 연습 소리는 빠바빰 뿜 삑삑 쿵 빽빽 드르륵 붐봄 뿌~ 귀에서 피가 나올지도 모를 소음이었다. 공기진동에 귀와 머리가 적응하려면 20분이 지나야 했다. 고막은 정신없이 진동했고, 무의미한 신호를 막아내려 머리는 항상 피곤했다. 악기 연습이 끝나면 귀에서 삐~ 소리가 따라다녔다.
우리 1학년은 매일 악기실 선반을 걸레로 닦았다.
봄비 내린 다음날 밴드부실 청소를 끝내니, 한 선배가 누런 주전자와 500원을 주었다. 건호와 나는 주전자에 막걸리 1,000원어치를 받으러 후문 산 쪽 흙길을 밟았다. 전날 내린 비 때문에 신발에선 진흙이 튀어 올랐다. 막걸리를 받으러 가는 나를 관찰하며 생각했다. 이게 또 무슨 상황인가. 지금 이게 나 맞아?
다음날. 잘 들어오지 않던 음악 선생님이 들어왔다. 선생님은 3학년들을 집합시켰다. 키 크고 연예인처럼 생긴 연호형은 악기실에 들어가라고 했다. 그 형은 항상 칼 같은 주름이 잡힌 빛나는 검은 교복을 입고 다녔다. 그 형을 제외한 3학년 선배들은 엎드려뻗쳐 자세를 했다. 선생님은 그들 엉덩이를 몽둥이로 퍽퍽~ 후려갈겼다. 밴드부 음악실에서 술 마시고 담배를 폈다는 이유였다.
음, 고소해. 거봐.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우리 괴롭히니 선생님에게 혼나지. 다시는 그러지들 마.
그다음 날. 찜질당한 3학년 악장은 하얀 장갑으로 악기실 선반을 쓰윽 닦았다.
장갑에 붙은 먼지를 보여주면서 2학년을 집합시켰다. 장의자를 넘어뜨려 아래 지지 각목을 발로 몇 번 빡빡~ 차 부러뜨렸다. 부러진 긴 각목을 집어 들었다. 1학년인 내게는 안티푸라민을 가져오라고 했다.
"선생님, 안티푸라민 좀 주세요" 본관 건물 양호 선생님에게 말했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뭐라 하지?
양호선생님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익숙한 듯 보였다. 작은 스테인리스 원기둥 통 안티푸라민을 받아 들고 밴드부실로 뛰었다. 빛이 없는 어두운 복도에, 하나~ 둘~ 고함 소리가 울렸다. 처절했다. 문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어야 하나 도망가야 하나. 몇 초간 서 있다가 동급생 생각에 과감히 문을 열었다.
2학년 악장 황규태 형이 맞고 있었다. 그는 찰랑 창랑 한 머리칼과 코밑엔 검은 솜털이 보이는 얼굴이었다. 드럼 담당이었다. 맞을 때마다 무릎이 툭툭 꺾였다. 충격음에 맞춰 하나 둘 셋 소리를 질렀다. 비명이었다.
다 맞고 옆으로 옮기면, 3학년 다른 선배가 바지를 조심스레 내리고 초토화된 엉덩이에 안티푸라민을 발랐다.
엉덩이엔 모세혈관이 가로로 몇 줄씩 터져있었다.
또 다른 2학년 선배가 옆에서 소리를 질렀다. 병 주고 약 주기를 3회전 한 후 멈췄다. 휴~ 끝났구나.
"1학년 관리 좀 잘해. 봐도 인사도 안 해. 청소가 이게 뭐야?" 3학년 악장은 이렇게 말하고 퇴장했다.
3학년이 나가고, 이젠 2학년과 1학년 우리들만 남았다.
"너희들 때리고 싶지 않아. 그런데 어쩔 수가 없어. 너희들도 들었으니 잘 좀 하자."
2학년 황규태 형은 맞을 때 큰 소리를 지르라고 했다. 우리도 맞을 때마다 갈라지듯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그 소리는 바닥과 벽에 사정없이 부딪혔고 용수철처럼 튕겼다. 여기저기 튕기며 반향이 되었고, 에너지가 소실될 때까지 밴드부실을 미친 듯 돌아다녔다.
2학년 다른 형이 우리 엉덩이에 안티푸라민을 빙글빙글 발랐다. 집에 오는 길. 유건호와 내가 탄 전철 칸은 안티푸라민 냄새 속에 투닥투닥~ 투닥투닥~ 흔들렸다. 1주일 동안 엉덩이가 불그죽죽하고 불룩해져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학년 초에 맞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는 1년 내내 맞았다. 내 인생은 왜 이런 걸까. 나는 맞기 위해 태어났을까.
학교는 왜 다녔을까?
<참고자료>
1. 색소폰이 리드 때문에 목관 악기목관악기가 되었을까요?, 유튜브 블럼 Vlumm - 음악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