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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표심 Nov 04. 2022

중2, [선생님 사랑] 아름다움이 우릴 구원할 거야

윤경옥 선생님

-중학교 채점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반장 역할 중 하나는 시험 채점 도우미였다.


  몇 과목 선생님들은 중간 기말고사가 끝나면 교무실로 나를 불러, 답압지 채점을 맡겼다. 나는 선생님에게서 받은 정답 종이를 받아 학생들 답안지에 갖다 댔다. 정답 구멍에 보이는 개수를 세고 단답형 답안을 체크해 빨간 색연필로 숫자를 적었다. 그 후 선생님은 최종 점검하고 점수를 적었다. 이런 일로 나는 교무실을 자주 드나들었다.


  중2 딱 한 번, 1학기 중간고사에서 공식 순위 전교 4등을 했다. 실제는 전교 3등이었다.


  중간고사 채점이 마무리된 후, 국어과 윤경옥 선생님이 교무실로 나를 불렀다. ( 윤경옥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채점을 맡기지 않으셨다. ) 국어과 12번 문제에 오류가 생겼다고 했다. 그래서 실제 내점수는 4점이 올라가야 하고, 옆반 반장은 4점이 깎이는 것이라 했다.


  총점 4점이 내가 앞서서 실제는 내가 전교 3등이란다. 그런데, 이미 통계는 보고가 되었고, 나중에 알게 된 일이라 수정을 못하게 돼 미안하다고 하셨다.



-완전학습 시대


  선생님이 왜 솔직히 얘기해 주시지? 말 안 해줘도 그만이었는데~


  나에게 3등이든 4등이든 큰 차이는 없었다. 단 한순간 기분뿐일 거니까. 지금 선생님 옆에 앉아 있는 게 중요했다.


  선생님이 내게 조용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 순간이 꿈같았다. 선생님과 나 사이 공간은 1m 남짓. 그 잔잔하고 안정감 있는 목소리를 가까이서 들을 수 있다니. 위협하지 않고 들떠 있지 않은 고요한 미소가 달린 목소리.  그런 행운의 순간을 길이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내 중2 성적이 좋았던 이유는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자습서 <완전정복> 대신, <완전학습>으로 공부했기 때문이다. <완전학습> 자습서와 문제집에서 중학교 문제가 대부분 출제되었으니 성적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완전학습>은 새로 나온 지 1년 되었고, 아직 학생들이 잘 모르고 있었다.


  이 자습서를 알게 된 것은 외사촌형 덕분이었다.


   나는 1년 선배인 사촌 형이 공부했던 자습서와 다 풀어버린 문제집을 방학 때마다 들고 왔다.


  내게 화장실은 심심한 곳이었다. 30분씩 그냥 앉아 있는 것보다 뭐라도 보면 나았다. 나는 <완전학습> 과목별 자습서를 들고 화장실에 가기 시작했다. 사회 공업 국어 영어 등 자습서 사이드에 인쇄된 참고자료도 재미있었다. 화장실에서 들춰본 자습서 때문에 각 과목 큰 그림이 그려졌다.


  자습서를 읽다 보니 질문할 거리도 생겼다. 의문점을 해결하려 했으니 수업시간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내 수업의 질은 높았고, 시험은 <완전학습>으로 대비해 성적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윤경옥 선생님과 모나리자 미소


  <완전학습> 문제집은 사촌 형이 공부하면서 답에 동그라미를 쳤기 때문에 그대로는 내가 풀 수가 없었다.


  4지선다 문제의 4가지 항목에 모두 동그라미를 쳐 버렸다. 그렇게 뭐가 답인지 알 수 없게 해 놓고 문제를 풀었다.


  몽둥이로 잡은 학습 분위기로 우리 반 성적이 전교 1등. 내 성적도 상위권. 이런 상황이다 보니 애들과 선생님에게 무시받는 일이 없었다. 무서운 선생님도 나에게는 친절했다.


  윤경옥 국어 선생님은 여성스러웠다.


  선생님의 내려온 앞머리는 얌전히 이마를 덮었다. 피부는 밝고 여리게 보였다. 얇은 윗눈썹은 머리칼에 살짝 숨어 있었다. 뒷 머리는 어깨 아래까지 내려왔고, 환한 귀는 머리칼 뒤로 숨지 않아 밝았다. 여자 수학 선생님처럼 눈을 동그랗게 크게 뜨지 않았고, 눈에 힘을 주는 일도 없었다. 쌍꺼풀 눈매는 약한 듯 그윽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보는 눈길은 자주 부드러웠다.


  인상을 쓰지 않았지만, 활짝 웃지도 않았다. 입술은 모나리자보다 조금 밝은 미소를 머금었다. 눈 내린 새벽의 고요함 같았다.



  선생님은 무릎 아래까지 오는 치마를 즐겨 입었고, 서늘해지면 니트나 스웨터를 입었다. 목폴라나 카라 있는 옷 때문에 빈틈없어 보였다.


  한  마디로 아름다웠다.



-나는 선생님을 지킬 거야


  윤경옥 선생님은 검은색 직사각 출석부와 국어책을 왼손으로 가슴까지 올려 안고 복도를 걸었다. 약간 높은 푹신한 슬리퍼에 발목 위 살짝 오른 하얀 양말을 신고 다소곳히 걸었다.


  보폭은 크지 않았다. 치마는 적당히 길고 품도 알맞게 여유가 있었다. 약간 빠른 속도로 걸으면 치마가 부드럽게 걸음을 감쌌고 생기가 돌았다. 얼굴과 몸 전체에서 교양미가 빛났다.


  수업시간엔 큰소리 내는 법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큰 소리를 질렀다.


  윤경옥 선생님이 수업을 하는데, 방해하면 내가 가만히 안 둔다는 신호를 자주 애들에게 보냈다. 떠드는 녀석이 생기면, 일단 나를 볼 때까지 고개를 고정시키고 눈에 힘을 주고 사냥개처럼 째려봤다.


  효과가 없으면, 선생님이 수업 중임에도 내가 큰 소리를 질렀다.


  "야~~ 조용히 안 해??~~~~"


  애들이 움찔하면 선생님은 잠시 멈추었다가 계속 수업을 이어갔다. 나는 선생님의 천사 같은 미소와 목소리를 보호하려 했다.


 지금도 선생님의 가녀리고 또렷한 목소리가 기억난다.   


  호수 같은 목소리

  달이 떠 있네 

  그 소리

  나를 적시니

  마음 둘레길을 거닐어 본다

  숨을 멈추고 눈을 감는다



-선생님의 아름다움


  2학년 가을 소풍. 약간 쌀쌀했다. 윤경옥 선생님과 사진을 찍었다. 선생님은 무릎 아래까지 오는 가을색 청색이 인접한 체크 치마에 부드러운 피부색 모직 니트 차림이었다.


여전히 긴 머리

아직도 가냘픈 눈

평화로운 미소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


  사진 찍기 직전 선생님은 털장갑 한쪽을 꺼냈다. 왼손에 털장갑을 끼고 내 오른 어깨 위에 살짝 올려놓았다. 그때까지 아무도 그런 적이 없었지.


  선생님 손엔 

  수줍은 듯 따뜻함이.

  제자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나를 휘감았다.


  "고마웠어 "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까. 나를 생각하는 선생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끼는 마음

  어깨에 내려앉고

  나는 아이스크림처럼

  스르르 스르르 


  나는 교복 왼쪽 가슴 이름표 아래 주머니에  은색 장식을 달고 있었다. 내가 클립을 구부려 만든 장식이었다. 하트♡ 모양이었다.


  '때림과 깨짐' 속에서

  중학교 잔혹사를 쓰고 있던 나.

  사막처럼 메마르고 오랜 가뭄에

  갈라져만 가던 내 마음.


  나를 적셔준 선생님의 따뜻한 손길.


  선생님의 미소

  선생님의 목소리

  선생님의 몸짓

  선생님의 털장갑


  선생님을 통해 만난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이 나를 만졌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따뜻한 아름다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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