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J 스치는 바람에
J 그대 모습 보이면 ♬"
신입사원 시절. 노래방 내 순서가 되면, 나는 제일 먼저 <J에게>를 불렀다. 뭔가 애절한 느낌이기 때문이었는데, 분위기 파악 못한 선곡의 실수라는 것은 한참 후에야 알았다.
한 바퀴 돌아 마이크가 또 내게 오고 있었다. 신나는 분위기로 무르익고 있는데 어떻게 하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가 아닌 건전가요를 찾아 책을 뒤적였다. '있어야 할 건 다 있구요 없을 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조영남의 <화개장터>가 딱이었다. 그다음은 <갯바위>. '나는 나는 갯바위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파도♬' 갯바위와 파도가 사랑을 하니 뭐 남녀 간 진한 사랑도 아니니 안심하고 불렀다.
그리고 비장의 카드 <풀잎사랑>을 최후로 일발 장전 발사했다. 풀잎 이슬 햇살로 변신하여 사랑을 하고, 풀잎사랑으로 종결되니 마음에 들었다.
"그대는 풀잎 나는 이슬
그대는 이슬 나는 햇살
사랑해 그대만을 우리는 풀잎사랑♬"
'사랑해'는 이 노래의 최고 높은음으로 절정이었다. 내 노래는 여기서 음이탈을 겪었다. 전문용어로 삑사리다. 그러면 다들 좋아했다.
'그대만을'. 나에게 친절히 대하는 철민 선배에게 손을 뻗는 제스처와 존경의 눈빛 쏘기를 하며 불렀다.
-남행열차, 미친 것 아니야?
짜리 몽땅한 최대리는 남행열차를 불렀다. 그의 바지 뒷주머니에는 가죽지갑이 꽂혀 있었다. 그가 엉덩이를 현란하게 흔들었지만, 지갑은 떨어지지 않았다.
"비 내리는 호남선 ♬
~빗물이 흐르고 내 눈물도 흐르고"
<남행열차>에선 비가 내리고, 눈물이 흘렀다. 기적소리는 슬피 울었다. 상실한 첫사랑의 기억도 흘렀다. 잊혀지긴 싫다. 사랑했었다고 뒷 꽁무니에 대고 말한다.
가사는 슬픔을 담고 있는데, 소파에서 뛰쳐나온 노래방 참가자들은 웃으며 춤을 췄다. 노래 속 드럼 반주 속도는 군인의 뜀걸음 비슷하게 빨랐다. 둥둥 딱~ 둥둥 딱~ 심장박동보다 약간 빨리 달렸다. 그래야 몸을 끌고 갈 수 있나 보다.
그들은 반복되는 리듬에 맞춰 엉덩이 어깨 온몸을 흔들어댔다. 탬버린도 찰랑거리며 리듬에 맞춰 같이 미쳐갔다.
나는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됐다. 내 뇌신경과 온몸이 어긋나 있었다. 그래도 분위기에 동조하는 썩은 미소를 보이며, 손뼉으로는 박자를 맞추었다. 이런 나를 보는 것은 불편했다.
몸동작들은 가사와는 정반대였다. 슬픈 가사인데, 왜 리듬과 속도는 슬픔을 배제하는 거지? 이해가 안 되니, 이 건 비정상인들 모임이라고 뭉개고 있었다.
-잘못된 만남
이어 달리는 다음 사람은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을 불렀다. 이 노래는 사랑과 우정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배신의 과정을 가사에 담았다.
"모든 것이 잘못 돼있는걸
너와 내 친구는 어느새 다정한
연인이 돼있었지♬"
이 노래의 강약 비트 역시 심장박동보다 약간 앞서 갔다. 심장의 손을 잡고 핫둘핫둘 잡아끌었다.
왜 부정적 감정이 실린 노래가 엉덩이 흔드는 노래로 만들어졌을까? 이런 노래를 왜 사람들이 좋아할까?
노래가 슬프다고 몸마저 던져버리면, 익사해 버리기 때문일까. 삶 자체가 슬픔과 고난의 연속인데, 이런 삶을 춤으로 앞에서 끌어가면 잊고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인가.
미치도록 좋고 행복한 내용의 가사에 춤까지 더해지면, 그 과도함에 거부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일까. 슬픈 가사를 붙여야 시기를 받지 않기 때문일까.
모순적인 상황과 좌절로 힘을 잃은 마음. 여기에 심장박동 보다 조금 빠른 강약 리듬을 첨가하면, 궁합이 맞는 요리가 되는 건가. 부정과 긍정이 섞이면 중화되듯. 차가운 배추에 뜨거운 고추가 들어가 김치가 되듯.
-무아(無我)의 춤
학교 때 배웠던 통일신라 처용가(處容歌)도 그런 건가. 의술을 행하는 의무(醫巫)로 해석되기도 하는 처용이 밤에 들어와 보니, 역신이 제 아내를 범한 분노와 좌절의 현장을 보고 나가서 춤을 췄다니. 인간들은 병적 상황을 춤으로 치료하고, 춤을 춰 슬픔과 좌절을 극복하려는 건가.
어릴 적 가끔씩 보았던 굿판은 또 어떤 경우인가. 고통과 한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굿을 벌인다. 징 꽹과리 북소리에 맞춰, 방울과 칼을 든 무당은 펄쩍펄쩍 제자리 뛰는 춤을 춘다.
빨강, 파랑, 노랑 원색의 치렁치렁한 옷을 입은 무녀는 죽은 사람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사자(死者)를 끌어올려 울고불고 하소연하기 위해 춤을 춘다.
심장율동보다 조금 빨리 달리는 반복적 리듬과 강한 강약 비트에 맞춰 무아(無我)의 춤을 춘다. 춤을 추면서, 슬픔과 좌절과 고통에 꽁꽁 묶인 마음을 해방해 보려 한다. 위장과 두뇌를 돌돌 말아 피의 순환을 막아버린 실타래를 풀기 위해 땀을 흘린다. 완전한 처방은 아닐지 모르지만.
-바벨론의 강가에서
외국 노래 중에는 보니엠의 <Rivers of Babylon>도 슬픈 가사의 춤곡이다. 이는 세계 어느 장소든지 디스코텍으로 만드는 노래다. 가사 속, 바빌론으로 끌려간 자들은 절망 가운데 울었다.
영어성경 킹제임스판(KJV)을 사용한 '바벨론의 강가에서' 에는, 남들이 강제하는 노래를 어쩔 수 없이 불러야 했던 좌절의 시간을 담았다.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a, we wept,
when we remembered Zion."
< Psalm 137:1 - KJV >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서
시온(Zion)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 시편 137:1 - 개역개정 >
"How shall we sing
the LORD's song
in a strange land?"
< Psalms 137:4 - KJV >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 시편 137:4 - 개역개정 >
바벨론의 노예들은 좌절의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춤을 추라고 하면 죽지 않기 위해 추었을 것이다. 절망의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춤을 추었을 것이다.
부조리한 인생을 겪으며
가끔씩
우리도 춤을 춘다.
나를 잊고
춤을 춘다.
무아(無我)의 춤을.
< 참고자료 >
처용가(處容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형대(고려대), 아내의 전염병을 물리친 향가<처용가> , 보훔대 한국고전문학 특강, 2021.11.23
< Boney M - The River Of Babylon >
Boney M - The River Of Babylon ( remix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