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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표심 Oct 27. 2022

책은 무섭고, 이야기는 재미있다

이야기 성서전집

1. 이야기 성서 전집


  국민학교 2학년부터 방학이면 책을 읽어야 했다.


  읽어야 할 책은 선문 출판사 캐슬린 보스의 6권짜리 『이야기성서전집』(1971년판).


  구약 4권 신약 2권으로 빼곡히 자세했다. 각권 평균 250페이지였고, 내용과 분량상 중고등학생용이었다. 이 걸 어찌 읽었는지 정말 무식했다. 별책부록 《성서의 역사》까지 총 7권이었지만 이 것은 평소엔 통과했고 화장실에서 가끔 보았다. 사진과 그림들이 많아 내겐 화장실 용이었다.


  『이야기성서전집』은 캐서린 보스가 자녀들을 위해 지은 역작이었다. 캐서린 보스는 유명한 성경 신학자 게할더스 보스의 아내였다. 이 책에는 군데군데 사진과 세밀한 삽화도 있었다.


  노아 홍수 그림. 이 삽화에서는 세상은 이미 물속에 잠겼다. 커다란 넓적 바위 하나만 겨우 숨 쉬고 있었다. 바위 위엔 절규하는 남녀 사람들.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보지만 절망이 얼굴에 새겨져 있었다. 그들의 건장한 팔다리 근육. 생존에 아무 쓸모없는 육체.



2. 별책부록


  별책부록 《성서의 역사》에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비옥한 초승달 지역 등 강 중심의 세계 문명 소개가 담겨 있었다.


  바벨탑 이야기의 근간인 바벨론의 지구랏트 벽돌 성탑(聖塔) 등 고고학적 내용도 실려 있었다. 딱딱히 얼어있는 물벽 바가지를 엎어 놓은 하늘에 별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바벨론 인들의 우주관을 볼 수 있었다.


  이 별책부록은 성경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의 책'이 아니라, 고대 근동 지리와 문명에 영향을 받은 '인간의 책'임을 어스름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이 것은 내 나이 40이 넘어서, 신화와 성서와의 관계를 엿보는데 중요한 방향타가 되었다.


   『이야기 성서 전집』덕분에 교회 성경퀴즈 대회는 항상 껌값이었다. 어른 대상의 설교에서 못 알아듣는 내용도 없었다. 이 책은 보물이었다.



3. 무서운 꿈을 꾼다


  다른 집 마루에는 문학전집 꽂혀 있었지만, 우리 집엔 한 동안 없었다.


  조용기 목사의 <요한계시록 강해>  <다니엘서 강해>, 기타 설교집이나 종교 관련 책들이 주로 있었다. 휴거와 대환란을 세대주의 입장에서 다룬 '핼 린드세이' 의 <대유성 지구의 종말>도 있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보고 인류의 종말을 다룬 책들은 무서웠다.

 

  아버지에게서 예수 재림과 최후의 심판으로 세상이 끝나는 말세 이야기도 들었다. 그 후 하늘을 쳐다보면, 어두운 하늘이 무너지며 큰일이 벌어질까 음산했다.


  인류의 시작인 아담과 하와부터 최후 심판까지 알게 되었으니, 이 세상을 다 아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전지((全知)했다.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했다. 나는 우주의 멸망까지도 아는 현자요, 통달한 인간이었다. 착각이었다.


  애들에게 우주 종말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애들도 신기하게 들었다.


  그 후론 무서운 꿈도 꾸었다. 검은 우주가 무너지면서, 수많은 트럼펫 나팔 소리들이 났다. 구름 사이로 핏빛 무지개가 무섭게 폭발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예수가 재림하는 꿈이었다. 꿈을 꾸고 나면, 심장이 뛰고 몸이 젖어 있었다.



4. 예수는 무섭기도 하다


  예수가 재림하고 세상이 무너지는데, 예수 편인 나는 왜 불안한 거지? 아직도 믿음이 없기 때문인가. 내 죄가 씻어지지 않아서 인가. 의심병이 저주를 받고 있어서?


  매일 동생과 주먹다짐. 엄마를 말려 죽이는 일들. 죄책감 때문일까.


  살아있는 예수는 병자들을 고쳤고, 배고픈 자들을 먹였다. 약자와 죄인들에게는 자비로웠고, 위선자들에게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결국 약했고 고통 속에 죽었다. 이제 살아난 예수는 나약한 인간이 아니었다. 손에 저울을 든 재판자로 올 것이다. 자비 없는 심판을 위해 온다.


  두 가지 예수의 모습 중, 나와 인류가 맞이할 예수는 어떤 모습인가. 선과 악을 심판하는 차가운 얼굴. 무서운 예수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가톨릭에서는 이 것을 인식했는지, 중간에 자애로운 마리아 여신을 도입했다. 모성애의 엄마를 통해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힘없이 나약한 어린 예수, 젖을 빨아야만 했던 아기 예수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성모송을 찾아보니, 젖을 빨기 이전 예수, 자궁 속 예수를 찬양하고 있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가톨릭 < 성모송 묵상-6 >




5. 인간 이야기를 읽자


  집에 있던 책들은 거의 읽어, 아버지의 사상을 알고 있었다.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렸지만, 나는 싫기만 했다. 느려 터진 노래도 싫었다. 가끔 음표 무시하고, 나훈아처럼 꺾어 부르는 찬송가는 이상했다.


  "나의 가~하~알길, 다가도~호~록,

   예수 인도하시니 ♬"


  천천히 부르는 노래는 숨 넘어갔다. 노래는 뭐가 중요하다고? 스피드~


  국민학교 6학년이 되면서, 서점에서 한 두 권씩 문학책을 사서 보았다. 종교서적만 읽기는 지루했다. 그리고 무서운 종교에서 벗어나야 했다. 최후 심판으로 몰고 가는 방망이에서 벗어나야 했다. 좀 편하게 즐겁게 살고 싶었다.


  <괴도 루팡-수정 마개>  <철강왕 카네기>  <해저 2만 리> 등 문고판 책들을 읽었다. 똥을 재생해서 음식을 만들었다가 실패한 내용의 이야기 책도 읽었다. 성서의 신에 관한 얘기가 아니고, 인간에 관한 얘기들이었다.



6. 서점 주인이 되자


  이런 책들이 재미가 있었다. 서점 주인아저씨가 부러웠다. 하루 종일 책 속에 파묻히는 곳. 거기가 천국 아닐까. 과학자에서 서점 주인으로 꿈을 바꿨다.


  내 꿈은, 국민학교 1학년 때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노래로 시작했다. 교회 크리스마스 발표대회에서였다.  


   "나는 나는 될 터이다.♬" 다 같이 합창.

   "대통령이 될 터이다.♬" 내가 독창.


   "옳다 옳다 그 이유는?" 다 같이 합창.

   "이 나라를 부강하고 잘 살게 만들고 싶어요" 내가 말한다.


   "옳다 옳다 네~가 네가

    대통령이 될 터이다♬" 다 같이 합창.


  그다음 해 육군대장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다.

  "나는 나는 될 터이다.♬" 다 같이 합창.

  "육군대장이 될 터이다.♬" 내가 독창. 젠장.


  교회에서는 대통령과 육군대장이었지만, 내가 스스로 가졌던 꿈은 '훌륭한 사람'이었다.


  3학년쯤 되니 훌륭한 사람이 뭔지 나도 알 수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꿈을 만들어야지. 뭘 때려 부수고 만들기를 좋아하니 과학자로 하자. 그러다 서점 주인까지 왔다. 소박해졌다.



7. 소설이 무서워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다른 집처럼 문학전집을 사달라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한국문학전집을 기대했다. 그러나 깨알 같은 글자의 하드커버 <세계문학전집>이 마루에 전시됐다.


  <오만과 편견> <주홍글씨> <백경> 등이 들어있었다. 소설은 읽기가 힘들었다. 며칠 있다가 이어서 읽어보려니, 외국사람들 이름이 낯설고 헷갈렸다. 며칠 전 내용이 뭐였지?


  소설이 어려운 이유는 또 있었다. 현재를 말하다가 갑자기 과거 장면이 등장했다. 작가는 독자인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가 가고 싶은 데로 나를 데려가고, 하고 싶은 말을 그냥 내뱉었다.


  소설은 이래도 되는 거구나. 그때 한 가지 배운 것이 바로 '왔다 갔다' '제맘대로'였다. 글은 그냥 그래도 되는 거구나. 단, 독자가 잘 따라오게 하는 게 문제지만. 지금 내 글도 제맘대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중이다.


  이때부터 어려운 소설과는 담을 쌓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책은 소설책이었다. 대학교 독후감 숙제를 위해 단편소설을 앞에 놓고도 벌벌 떨었다. 줄거리를 제대로 알 수나 있을까. 무서웠다.



8. 옛날이야기를 듣지요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쉬웠다.


  내가 서부이촌동 인간세상에 나오면, 누나들이 있었다. 7살 남자아이였지만 처음 보는 동네 누나들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따라다녔다.


  누나들은 화단가에 앉아서, 졸라대는 내게 옛날 얘기를 들려주었다. 세상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런 얘기들을 듣기 위해 다음날도 누나들을 찾았다.


  작은 외할머니댁 삼촌에게도 얘기해 달라고 했다. 6학년 삼촌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함께 담벼락 넘어 철길을 바라보고 앉았다. 삼촌은 주로 역사 얘기를 했다. 죽어서 무덤이 풀이 나지 않았다는 최영 장군 얘기, 죽을 때 목에서 흰 피가 나왔다는 이차돈 얘기 등이었다.


  고등학생이었던 큰 이모 댁 큰형에게선 두 가지 얘기를 들었다. 꽤 많은 종과 고등학교 살인사건 얘기였다. 꽤 많은 종은 한양에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갑질의 대명사인 도련님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종의 해피엔딩 이야기였다.



9. 이야기를 만든다


  종은 재치 있게 도련님 꿀떡도 빼앗아 혼자 먹었다. 타고 온 말도 팔아먹었다. 한양은 눈감으면 코 베어 가니 눈뜨고 말고삐 줄만 보고 있었는데, 말이 없어졌다고 거짓말을 지어 모면했다.


  고등학교 살인사건 이야기 공부와 운동 못하는 게 없는 친구를 시기해 죽이고, 건축 중인 건물 벽 안에 넣고 시멘트로 발라버린 것으로 출발하는 으스스한 얘기였다.


  나도 우리 애들이 어렸을 때, 침대맡에서 즉흥으로 피망맨 이야기를 들려줬다. 거기선 팬티만 입은 피망맨이 망토를 휘날리며 차가운 하늘을 날아올랐고, 악당들을 주먹으로 때려 주었다.


  세상엔 이야기가 많다.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를 듣는다. 있을 법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있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재구성한 것이기도 하다.


 궁금한 세계의 기원들에 대해선, 신화를 만들어  들려주기도 한다.


  책 이전에

  이야기가 있었다.


  신들의 이야기이라지만

  알고 보면 인간의 이야기이다


  인간 세계엔 이야기가 있다.




< 나는 나는 될 터이다 >


나는 나는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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