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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 28. 2022
하나님, 최고의 스승을 보내 주세요
조셉 캠벨과 내 아내
1. 선생 참 쉽다
"1번 답, 기역이지요. 2번 답, 디귿이지요."
달걀이 10분 만에 익을 듯한 날, 스피커로 고3 국어 보충강의가 진행됐다. 강의는 사지선다 각 문항마다 정답만 죽 불러주고는 끝이었다. 그 선생님은 뭘 가르쳐야 하는지 몰랐다. 나는 고3이란 말씀.
고3 영어 이빨 선생님은 더했다. 영어 지문을 읽고 해석하면 10분이 지나간다. 왼손으로 안경테를 확 낚아채는 제스처를 취한다. "여기 국회의원 아들 있으면 봐주고" 하면서, 40분 동안 자신이 운전기사 두고 학교로 출근한 사람이라는 둥 정치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둥 놀라운 이빨로 수업시간을 도배하면 종이 울렸다.
1학년 영어 선생님 별명은 이름 때문에 짱구였다. 짱구 선생님 입술 위에는, 축소된 지구본 반을 잘라 놓은 것처럼 검은 점이 얹혀 있었다.
2. 서울학원 강의실
짱구 영어 선생님이 한 문장을 읽고 "어~~"하는 쏠 톤을 냈다. 자습서 해설 부분으로 고개를 돌리는 소리였다. 세월아 내월아 해석을 읽고, 애들 시키면 끝이었다. 짱구 선생님은, 고3 연말 노량진 서울학원 강의실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다.
서울학원 성문종합영어 대형 강의실에는 400명이 넘는 인파로 북적댔다. 학교에서는 영어란 걸 배울 수가 없어서 과외금지 조치가 있었지만, 고3 국가의 눈을 피해 몰래 학원 견학을 간 거였다. 어깨가 닿아 서로의 체온으로 달아오른 얼굴들. 저마다의 날숨으로 탁한 공기를 마시며 부대끼는 수강생들.
마이크를 잡은 조응호 선생은 가끔 진한 농담을 섞었다. 나는 복도에서 안을 기웃하며 창문으로 강의를 도청했다.
"As가 문장 앞에 오면, because로 해석한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because라...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니 역시 그랬다.
"저기 너~ 그래 너, 네 엄마 아빠 밤 테크닉이 안 좋았냐? 어떻게 그렇게 생겼냐?"
낄낄~ 꺄르르 까르르 웃어대는 학생들을 훑어 보는데, 깜딱이야. 짱구 선생도 보였다.
3. 독학이다
"뭐야~ 아니 짱구 선생이 여기서 종합영어 수업을 듣는 거야?"
기가 막혔지만, 여러모로 생각했다. 교수법을 듣는 건가? 영어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건가.
조응호 선생님은 '美'에 관한 영문을 해석하고 한 마디 덧붙였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곧 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다. 아름다움은 그런 거야." 이렇게 말하곤, 종합영어강의를 이어갔다.
고3 우리 반 담임선생님은 수학담당으로 50분 동안 30문제를 혼자 미친 스피드로 풀다 나갔다. 학력고사 유형분석이나 전략도 없이. 마구마구 칠판에 풀고 나갔다. 그래도 담임선생님은 고대 출신이고, 첫 고3 담임에 젊은 패기가 있고, 우리와 호흡은 잘 맞아 가깝게 지냈다.
나는 고교 3년 동안, 국영수과 포함 대부분을 독학했다. 하는 수없이.
4. 지리박
독학하기엔 자세한 책이 좋았다.
당시 막 출간된 <맨투맨 종합영어>가 강의식이었기 때문에 마음에 들었다. 강의 현장처럼 쓰여있어 독학해야 하는 내게 딱 맞는 책이었다.
지금도 나는 보충강의가 없어도 되는 자세한 책을 선호한다. 그런 책들은 참고서적, 각주 등이 자세하고 사오백 페이지가 넘는다. 읽기 괴롭지만 독학이니, 어쩔 수 없다.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고등학교 선생님에게 제대로 배운 것은, 고3 때 인문지리와 생물 딱 2과목이었다. 자칭 지리박, 박택 선생님이 칠판에 단 번에 그리는 세계지도는 예술이었다. 곡선 하나하나가 의미가 있고, 정확했다. 사람의 특징만 꼬집어 요약한 만화처럼 제대로 살아 움직였다.
지리박 시간엔 눈물 났다. 책에 5분간 밑줄만 긋고, 남은 시간엔 자기 부인 자랑하다가 학생들 괴롭히는 시간으로 세월을 탕진하던 1학년 국토지리 선생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5. 고교 : 자퇴가 답이다
''그동안 뭘 배웠노?''
지리박 박택 선생님은 안타까운 눈으로 우리를 보았고, 우리는 제발 살려달라는 애절한 눈을 했다.
생물 목진국 선생님은 수정란이 낭배기로 접어들면서 외배엽, 내배엽, 중배엽을 형성하는 것을 그림을 그려 가르쳐 주었다. 쉽지 않은 개념인데, 설명을 들으니 따로 암기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인간 발생은 그래야 했다.
"세상에 이렇게 가르치는 선생님도 다 있네~ 서울대 출신이라 달라도 뭐가 달라"
목진국 선생님은 다음 해 서울학원으로 옮겨 생물 최고 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고3, 학교에서는 배울 게 없어 원망하다가 2학기가 오자, 나는 폭발했다.
"아버지, 저 자퇴할래요."
아버지는 교회 서울대 재학생 형을 만나게 해 줬다. 그 형은 학교생활과는 무관한 이 얘기 저 얘기를 했지만, 함께 있다 보니 내 감정이 수그러들었다. 학교는 그냥 다니기로 했다.
6. 대학 : 아부와 유혹의 기술
나는 스승이 항상 갈급했다. 대학 입학 후 기도제목 하나를 정했다.
"하느님, 최고의 스승을 만나게 해 주세요" ( 이 글에선 하느님으로 바꾸었다. 가톨릭 신자를 위해 )
대학 때 도움된 과목은 심리학이었다. 조긍호 교수(서울학원 조응호 선생님과 비슷한 이름)의 <일반심리학> <사회심리학> <성격심리학>, 김인자 교수의 <자기표현의 심리적 기초> 등은 나와 타인을 알아가는데 기초가 되었다.
"사람은 아부인 줄 알면서도, 아부하지 않는 자보다 아부하는 자를 더 좋아합니다."
-조긍호 교수 사회심리학 강의-
'아부'라는 인간행동에 호기심을 키운 덕분에, 나이 40이 넘어 『유혹의 기술』의 저자 로버트 브라운을 알게 되었다. 계속해서 로버트 브라운의 두꺼운 벽돌 책들 『권력의 법칙』 『마스터리의 법칙』 그리고 결정판인 『인간본성의 법칙』으로 나 자신을 몽둥이질했다.
7. 비교신화학, 비교종교학의 조셉 캠벨
대구성서아카데미 정용섭 목사님의 글 속 철학사상을 접했다. 기독교에도 철학을 말해주는 데가 다 있네.
이 세상에 좋은 스승은 반드시 있다. 훌륭한 스승은 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준다. 나도 좋은 스승이 되고 싶다. 그래서 잡은 고기를 주기보다 깨우친 원리를 알려주려 한다.
원리를 알면 응용이 가능하고, 또 다른 원리를 발견할 힌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상대가 이해하는지 확인하면서 자세히 말하는데, 이게 병이라 지루한 유사 반복이 많다. 이게 바로 꼰대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내 얘기를 들으면, 저절로 암기가 되지 않을까.
비교신화학과 비교종교학의 최고봉 '조셉 캠벨'의 『신화의 세계』『원시신화』『신화의 힘』『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등을 접했을 땐, 기독교와 종교로 고민하던 안개가 걷혔다. 사탄의 상징으로만 알았던 뱀이, 허물을 벗고 다시 사는 부활을 상징한다는 설명을 접하고 뒤로 넘어갈 뻔했으니까.
8. 선악과를 먹고, 뇌구조가 변했다
뱀 이야기만으로도 내가 알던 세상은 위아래가 뒤집혔다.
그땐 그랬다. 아는 게 없으면 그렇다. 대한의사협회 로고, 세계보건기구(WHO) 마크에 빙글빙글 올라가는 뱀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시절이었다.
일요일 내가 다니던 교회 예배를 빠지고 동네 도서관 서고에서 조셉 캠벨의 『네가 바로 그것이다』의 마지막을 막 읽던 날, 눈물 콧물 감동의 불구덩이었다. 오른쪽에 책들이 들어찬 책장들이 도열해 있고, 그 복도 왼쪽과 내 앞에선 밝은 빛이 들어왔다. 하느님의 은총의 빛이었다.
예배시간. 내 몸은 교회를 떠나 도서관에 있었고, 하느님의 강렬한 빛이 내 눈으로 쏟아져 들었다. 그 빛을 통해 들어오는 하느님의 감동에 나의 뇌 속 뉴런들은 미쳐 날뛰었다. 하늘이 열리며 비둘기가 예수에게로 내려오는 바로 그 장면 같았다.
'바로 그 순간' 내 뇌의 구조가 변했다. 내 몸의 세포들은 즐거이 뛰어놀았고, 어머니가 나를 낳아준 은혜에 감사했다. 죽지 않고 지금까지 숨 쉬고 있는 내가 대견했다.
그날 나는 선악 지식나무 열매를 마저 먹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눈물과 콧물이 뜨겁게 흘렀다.
"조셉 캠벨 같은 스승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네요~"
로버트 브라운, 조셉 캠벨과 그 후로 만난 수많은 스승들...
눈을 뜨고 보니 과학, 예술 등 도처에 스승들이 널려 있었다.
최고의 스승을 구한 기도 응답은 이렇게 이루어졌고 아직 진행 중이다.
9. 아내는 제자였다
40세가 넘어간 날 《아트 앤 스터디》의 모든 강의 수강쿠폰을 100만 원에 구매했다.
1년 동안 유효했다. 서양철학, 동양철학, 불교철학, 한국철학, 윤리학, 정치철학 등을 들었다. 니체도 들었다. 열하일기도 들었다. 생각들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조각이 조합되면 아내를 붙잡고 식탁에서 열변을 토했다.
아내는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알을 깨고 나온 새끼가 어미 새가 토한 먹이를 받아먹듯 진액을 먹었다. 나는 배우고 깨우친 신기한 내용이 생기면 자주 아내에게 알려줬다. 아내도 내 얘기를 귀담아 들었다. 그렇게 내 아내는 내 제자가 됐다.
솜털만 있던 아내에게 날개 깃털이 돋아나 날 수 있게 되자 판도가 바뀌었다. 결혼 후 28년 가까이 깨달음을 나눠줬는데, 이젠 다 안다고 배우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갱년기 호르몬 난조를 겪으며 고분고분하지도 않다. 여자는 호르몬이 다인 것 같다.
내가 했던 말들은 이제 부메랑이 되어 내 뒤통수를 노린다. 이제 아내 앞에선 말수를 줄이며 호르몬 작동을 살펴야 한다.
* 여자와 호르몬 참고 자료 *
<호르몬 찬가 : 진화 심리학으로 풀어 가는 호르몬 지능의 비밀>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
<은밀한 몸 : 물어보기도 민망한 은밀한 궁금증>
10. 최고의 스승은 누구?
아내는 선포했다.
"이제 가르치려 들지 마"
"오이마사지 글 쓴 거 보내줄까?" 내가 말했다.
"아니, 보내지 마" 아내는 단호했다.
아내는 이제 사춘기다. ( 이 말은 아내가 정말 싫어한다 )
남편과 분리된 새로운 자아가 생겼다. 호기심 어렸던 눈가는 사감선생 눈매로 변했다. 신기한 듯 경청하던 여린 소녀는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세월이 데려간 걸까.
오히려 내게, '그렇게 장황하게 말하지 말라. 100번은 더 들었다. 카톡으로 사람들 괴롭히지 말라.' 조용한 말이지만 칼을 숨겼다.
아내는 고수가 되었다. 이제 최고의 스승은 바로 아내다. 무릎 꿇고 배워할 사람은 바로 나. 힘의 균형이 바뀌었고, 전세는 역전됐다. 이 걸 아직도 인정하지 못하는 내가 문제를 일으킨다. 하느님께 최고의 스승을 보내달라고 한 기도응답은 지금도 이렇게 진행 중이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나는 말한다.
"내가 또 뭘~ 잘못한 건데?"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
< 조용필,단발머리 >
못잊을 그리움 남기고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
조용필, 단발머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