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에 관해서 나는 때로 사람들에게 오해를 산다. 마음이 통하는 몇몇 사람들과 깊고 좁은 관계를 지향하는 나로서는 괜한 너스레와 빈 말을 쏟아내야 하는 피곤한 자리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시끌벅적한 것보다 조용한 것을 선호하고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방안의 작업 공간에서 보내는, 완전한 내향형인 나에게 사람들과 만나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각오를 해야 하는 일임에도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다며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는 사람들은 왕왕 있었다.
물론 모든 관계의 시작은 하잘 것 없는 대화와 일상의 공유에서 시작된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핵심은 그 '일상'의 기준이 모두 제각각이라는데 있다. 나는 가장 친한 친구와도 일 년에 몇 번 정도 만나고, 한 번 만날 때 몰아서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떠는 편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아바타 : 물의 길>에서 멧케이나 부족이 가끔 찾아오는 툴쿤 무리들과 교감을 하는 그 장면이 있는데 그걸 보면 꼭 내 상황이 떠오르곤 한다. 멧케이나 부족 사람들은 그렇게 오랜만에 만나는 툴쿤임에도 영혼의 교감을 나누고 가족처럼 애틋하게 생각하질 않는가. 멀리 있어도, 가끔 보아도 어제처럼 선명한 친구 관계도 분명히 존재한다. 어쨌거나 나의 경우에는, 그런 관계를 선호하는 편이다. 내 곁에 남아있는 친구들 역시 그런 나의 습성을 이해하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말이다.
'나는 이러이러한 인간이고, 아마도 당신이 평소에 생각하는 그런 친구가 될 수는 없을 거예요.'라고 말을 해도 그런 나를 이해하고서 끝까지 친구로 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결국 서먹서먹해지다가 등을 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어긋나 버린 관계에서 누가 옳고 그른지 따질 수는 없다. 단지 서로가 인간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몰랐을 뿐이며, 저마다 갖고 있는 친밀함의 기준을 오해하고 오인했을 뿐이다.
친밀함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면 벌어진 차이만큼의 영역이 생겨난다. 그 영역이 바로 서운함의 정체다
천천히 알아가면서 친밀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매번 눈도장을 찍은 만큼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람이 사람에게 느끼는 호감이나 친밀함의 정도는 모든 사람에게 제각각이다. 그런데 어떤 관계에서 서로 친밀함을 느끼는 정도가 다른 두 사람이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 필연적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서운함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서운함을 느낄 때는 그게 단발성으로 결정되는 감정이 아닌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될 수는 있어도, 알게 모르게 조금씩 서운함이 쌓여서 마치 그래프에서 적분을 한 것처럼 어떤 영역을 넓혀나간다. 처음에는 그 크기나 폭이 작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커지고 서로가 친밀하게 여기는 정도가 벌어질수록 그 영역은 더 큰 폭으로 증가한다.
서운한 감정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 두 사람의 벌어진 친밀감 사이의 괴리만큼 계속해서 채워지지만 그 모든 감정이 쏟아지는 건 단 한순간에 벌어진다. 문제는 그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마침내 서운함의 임계값에 도달한 사람이 먼저 쌓인 것을 터트리면 대개 관계의 파탄이 벌어진다. 그런데 그 관계의 파탄이 좋은 말과 행동으로 끝나는 경우는 드물다. 세상엔 온갖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있으므로 그런 불편한 관계가 늘어나는 게 좋은 일일 수는 없다. 특히나 직장이나 학교에서처럼 매일 봐야 하는 사람이 그렇게 되면 그것만큼 불편한 게 또 없다. 내가 잘못한 게 없어도 불편해지는 이 황당한 상황에 처하지 않으려면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기 위한 방비책이 필요한 법이다.
사실 친밀함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두 사람의 성향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먼저다. 그러나 실제로 상대의 성향을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건 예의에 어긋날 때도 있고 무턱대고 터놓고 이야기하기엔 계기가 없거나 곤혹스러운 지점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 자신의 성향을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두 사람은 서로의 궤적이 어디까지 벌어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으며, 서운함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 큰 폭으로 쌓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요즘 사람들이 MBTI 결과를 공유하는 것은, 과거처럼 이웃과 매일 소통하며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하는 시절이 아닌, 파편화된 사회 속에서 서로의 성향을 미리 파악해 두려는 강한 욕구가 작용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혹자는 MBTI 검사가 정확한 검사가 아니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MBTI를 공유하는 유행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혜롭다고 하고 싶다.
만약 MBTI가 정확한 검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유행이라는 핑계 혹은 성격 검사라는 구체성을 띄고서 상대에게 좀 더 손쉽게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할 기회가 생긴다. 분명히 다른 성향을 가졌다면 서로 친밀함의 궤적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고, 혹은 그 차이를 마침내 극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서로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점에서 관계를 부드럽게 끝내거나 이어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게 진짜 내 성격이든 아니든, 그걸 빌미로 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가. 그래서 MBTI가 유행하는 게 마냥 뜬구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단순한 유행에 인생의 중요한 포인트인 인간관계를 모두 맡길 수는 없는 법이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스스로 나 자신의 성향을 부지런히 실험하고 연구해서 깨달아야 하고, 또한 상대방에게 그걸 정확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하며, 그걸 부끄럽다거나 주저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성향이 대중적으로 선호되거나 매력적인 인간과는 거리가 먼 것일 때가 있다. 자의로 내 성향을 바꿔보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그걸 원하고 있다면 그걸 고치는 것도 좋은 방법이기는 하나, 현실적으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내 성향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고 고백할 수 있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
혼자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때로 우리에게 용기를 앗아가지만 상대에게 나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무례가 아니다. 오히려 그걸 방치했을 때 우리가 감당해야 할 후과는 서운함의 적분값처럼 감당할 수 없는 크기가 될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다소 껄끄러울지 몰라도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내가 진짜로 원하는 삶과 상태가 뭔지도 차츰 알게 된다. 그리고 혹시 아는가, 그러다 보면 정말 나완 딴판인데도 내 모습을 인정하고 진지한 소통을 이어갈 둘도 없는 친구를 만나게 될지. 나의 평안하고 조화로운 삶과 사람들을 위해서 오늘도 건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