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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민 Oct 26. 2024

나이가 들수록 주목해야 할 그 사람의 모습


어릴 때 시장통 문구점에서 어머니에게 하얀색 '슈퍼 그랑죠'를 사달라고 울며 떼를 썼던 기억이 난다. 변신이 가능한 그 로봇은 문구점에 진열된 로봇들 사이에서도 가장 위에, 당장 바닥에 별모양 마법진을 그리면 튀어나올 것 같은 생생한 모습으로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정확한 가격까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그곳에서 가장 비싼 물건이었을 것이다. 장난감 코너에서 부모라면 누구나 겪을만 한 그 상황에서, 어머니는 다른 변신합체로봇을 사주는 걸로 갈음하려고 했으나 집에 가서도 나는 그 슈퍼 그랑죠를 얻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유행하는 만화를 보지 못한 어른들 입장에서는 '로보트 모양에 변신만 되면 그만 아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그랑죠냐', '아니냐'의 차이는 하늘과 별 차이인 것과 같았다. 마치 어른이 되어서 슈퍼카와 슈퍼카를 어설프게 흉내 낸 튜닝카가 완전히 다른 걸 아는 것처럼, 명품 로고만 흉내 낸 가방과 명품샵에서 산 가방이 완전히 다른 걸 아는 것처럼, 그랑죠와 그랑죠가 아닌 변신로봇의 차이는 분명했다.


갖고 싶은 걸 갖겠다는 욕망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아동기에는 친구들끼리 자신이 어떤 장난감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누가 '변신 블랙옥스'를 갖고 있느냐, 누가 '1등 딱지'를 소유하고 있느냐, 그런 것들이 친구들 사이에서 부러움을 사는 중요한 요소들이었다. 실제로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에서 왕딱지나 유행하는 만화의 주인공 로봇을 들고 다니는 아이는 꽤 많은 관심을 받곤 했다. 적어도 어떤 놀이나 그 만화의 유행이 지나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 교복을 입고 본격적인 단체 생활을 시작하는 중고교 무렵이 되면 좋은 물건을 갖고 있다고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지는 않는다. 학창 시절에 부러움을 사는 요소들은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대개 한 인간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은데, 흔히 '짱'이나 '통'으로 불리는 학년의 싸움왕들이 가진 위세나 무력이 부러움이 대상이 되기도 했고, 반대편에서는 전교 1등이나 공부 잘하는 무리들의 학습 아우라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운동부의 운동 잘하는 친구도 부러움의 대상이 됐고, 게임 잘하는 친구도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남중남고 기준)


그리고 대학생 때는 연애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외모를 뽐내거나 예쁘고 잘생긴 것에 혹하고, 졸업반은 토익 점수나 어학연수 같은 스펙과 경험에 눈독을 들이는데, 이제 친구들이 하나둘씩 취업을 해서 직장을 갖게 되면 너도나도 첫 차를 끌고 오기 시작한다.


생애주기의 한 부분에 도달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자신이 이룬 것들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각양각색의 자랑거리들을 들고 온다. 당연하다. 응당 그 나이대에 흔히들 자랑할 만한 것들이거나, 마땅히 칭찬해 줄 만한 것들이라면 부러워도 해주고, 정말 대단하다며 치켜세울 줄도 알아야 어른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격려와 인정이 사람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다음부터가 문제다. 청년기를 지나 이제 긴 인생의 여정을 설계해야 하는 때라면 그게 철학적인 질문이든, 실천적인 질문이든지 간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인생의 기둥을 세워야 할 이 무렵에 잘 성장한 사람들은 자신이 개척해 온, 그리고 개척해 나갈 세계를 들고 오기 마련이다. 자영업자라면 자신의 가게를, 회사를 차린 사람이면 자신의 사무실을,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은 자기가 맡았던 프로젝트를 들고 와 자랑스럽게 꺼내놓곤 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가오나시의 허기는 무엇을 자랑해야하는지 모르는 어른들의 모습과도 닮았다


하지만 이때 어떤 사람들은 진취의 가능성을 접고 다시 아동기로 돌아가곤 한다. 뭔가를 가졌다는 소유욕만을 추구하면서 타자에게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데 목을 매는 것이다.


언젠가 동네 마트 사장님에게 황당한 사연을 하나 들었는데, 하루는 한 손님이 대뜸 맥락도 없이 '우리 남편 현대자동차 다녀요'라고 자랑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마트 사장님은 그 사람과 면식도 없고(있었다고 해도 수없이 스쳐간 손님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딱히 직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예, 좋으시겠습니다.'라는 마트 사장님의 현명한 대답에 만족했는지 남편이 자랑스럽다던 여자는 흡족한 미소를 띠며 가게를 나섰다고 한다.


자기 자신도 아니고 남편이 대기업에 다니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랑하지 않고 견디지 못할 정도라면 그녀의 삶은 대체 어떠하단 말인가. 대저 좋은 직장을 다니는 배우자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건 누구나 가질 만한 생각이긴 해도, 그걸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녀야 한다는 건 역시 이상한 일이다.


정반대의 케이스도 있다. 내가 잠깐 공공기관에서 일하고 있을 때 만난 동료는 남편이 꽤 좋은 대기업을 다니고 있었는데도 남편의 직업에 대해 그걸 자랑하거나 으스대는 것(그마저도 내가 물어서 알게 된)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과거에 다니던 좋은 직장에 얽매이지도 않았고, 다만 그녀가 열성적으로 내게 자랑한 건 얼마 전 오픈한 작은 인터넷 쇼핑몰과 자신의 사업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장난감으로 만족하던 유아기나, 어른이 되었다는 착각에 폼 잡고 다니던 청년기를 넘어 무릇 긴 인생의 종주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만날 사람들에 대해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그 사람이 무엇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또한 자랑하려고 하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포방터 시장에서 백종원 대표에게 발굴돼 훌륭한 요식업자가 된 연돈 돈가스의 김응서 사장의 SNS를 보면 꽤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도 음식 사진이나 가게의 이모저모에 대한 내용 말고는 다른 것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런데 무고한 시민을 롤스로이스로 짓밟은 조폭남처럼 으레 수상한 돈을 벌어들인 이들의 SNS 계정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값비싼 차량이나 명품, 귀금속으로 도배돼 있다.


그런 일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랑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인데, 이상하게도 우리의 눈에 다른 것처럼 보인다. 다른 모든 선입견과 사건에 대해서 다 잊어버렸다고 치고, 위에서 순전히 그 사람이 자랑하고 있는 것만을 놓고 봤을 때 당신이라면 어떤 타입의 인간과 좀 더 가까이 지내보겠는가.


물론 사기를 목적으로 빈깡통이나 다름없는 성과를 부풀려 말하는 인간 부류도 있기 마련이고, 그저 우월감에 젖어 자신이 이룬 것들을 남들과 비교할 목적으로 자랑하고 다니는 인간 부류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작은 것일지라도 자신의 영역을 차근차근 넓혀온 사람들은 그걸 흉내만 내는 사람들과는 다른 저만의 뚝심이 있다.

이 사회에서 진정한 성취를 추구하는 사람을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그들은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일에는 대단한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한 예로 거친 영국 축구계의 그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축구 스타 손흥민 선수의 몸에 밴 겸손과 신중함은 그저 연습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도 무엇인가를 갖고 싶고, 또한 자랑하려는 사람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을 가지려고 하는지, 무엇을 자랑하려고 하는지는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앞으로 진보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시 과거의 아동기로 돌아간 사람도 있다. 그곳을 주의 깊게 보면 이 사람이 장차 대업을 이룰만한 인물인지, 혹은 오랫동안 친구로 지낼 수 있는 사람인지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내게 무엇을 자랑하는가. 무엇을 가치 있다고 주장하는가. 고개를 들어 길고 긴 인생의 동반자와 러닝메이트로서 함께 갈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다면, 갈수록 두터워지는 사회인들의 두꺼운 얼굴 아래를 들여다보고 싶다면, 무엇보다 '자랑'을 주목하라. 


그가 하는 자랑이 곧 그의 정체성이자 미래를 말해주는 지표이고, 더불어 타인의 자랑을 보는데서 그치지 않고 무엇을 자랑할 것인지 스스로 고민하는 자세까지 가진다면, 적어도 삶의 태도에 관한 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확실한 해답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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