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영화 <대부>에 대한 글을 썼을 때의 일이다. 영화의 한 장면을 소개하면서 대사를 인용할 일이 있어서 대사를 옮겨 적었는데, 자주 소통하던 한 독자님이 내게 대사가 틀린 것 같다는 귀띔을 해주었다. 문제가 된 대사는 다음과 같았다.
Bonasera, Bonasera. What have I ever done to make you treat me so disrespectfully?
보나세라, 보나세라. 내가 대체 어떻게 했길래 자넨 나에게 이렇게 불경한 겐가?
영화 <대부>(1974) 중
종종 내가 인용하는 외화의 대사는 대개 기존에 번역가들이 해석한 번역본을 쓴다.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듣기에 이상하다면 원문을 한 번 더 찾아보기는 하지만, <대부> 자체가 워낙 유명한 영화이기도 하고, 그 장면은 또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해서 이미 널리 퍼진 번역을 추호도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보나세라(buonasera)'라는 말이 이태리에서는 일반적으로 '저녁 인사'나, '맙소사'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이태리어에 능숙한 해외 거주자의 지적이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독자님의 말이 맞는다면, 나는 그저 탄식인 대사를 누군가의 이름으로 착각해 마치 '맙소사야 안녕' 같은 식으로 써서 올린 셈이 된다.
이 장면은 의뢰인이 대부에게 무례한 살인 청부를 했고, 대부가 언짢아하는 부분인데, 장면의 맥락으로 봐도 역시 '맙소사, 자넨 내게 왜 이렇게 불경한 겐가?'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비록 글 전체에서는 작은 부분이지만, 제보가 사실이라면 해석 오류의 정도가 치명적인 수준이어서 다른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작은 실수에도 득달같이 달려드는 온라인 세계의 생태를 몸소 겪어왔던지라 이런 지적이 있으면 일단 긴장하게 되는 게 당연했지만, 독자님의 답글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부에게 요청하는 사람의 이름이 보나세라라는 건 지금 알았어요! 원래 이태리어로 good evening 인데, 제가 이태리 가서 사람들이 보나세라를 쓸때의 상황을 보니 '이럴수가' 또는 '맙소사'의 의미로도 많이 쓰더라구요. 작가가 일부러 그런 이름을 택한걸까요?"
독자님의 답글 중
이 독자님의 답글에는 몇 가지 포인트가 있다. 자신은 <대부>를 볼 때 이 대사에서 '보나세라'를 '맙소사' 정도의 의미로 읽고 있었으므로, 혹시 자신이 그걸 잘못 해석했을 수도 있다는 걸 먼저 밝힌다. 그리고 단어의 원래 의미를 사전적 정의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 경험'임을 강조해서 이 역시 틀릴 수 있음을, 또한 우연찮게 알게 되었다는 방식으로 밝힌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단어의 의미를 결정할 방향타는 상대에게 맡겨둔다.
한 가지 반전은 있다. <대부>에 등장하는 '보나세라'는 '아메리고 보나세라(Amerigo Bonasera)'라는 풀네임이 있다. 이태리어 보나세라(Buonasera)와는 철자도 조금 다르다. 다시 말해, '보나세라'는 진짜 이름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태리어를 잘 모르는 내가 같은 실수를 할까 봐 정확히 언급은 할 수 없지만 아마도 '장그래' 같은 이름의 느낌이 아닐까 싶다. 작품 속 캐릭터를 만들 때 종종 캐릭터의 속성을 이름에 빗대어 은유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대부>의 그 대사가 장면의 문맥을 살폈을 때는 독자님의 지적대로 '맙소사'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더 정확하게는 재치 있는 언어유희처럼 '보나세라, 맙소사.( Bonasera, Buonasera )' 같은 의미로 그 대사가 등장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이 해프닝에서 정답을 맞힌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두 사람의 배움이 있었을 뿐, 서로를 무시한다거나 업신여기는 태도는 없었다.
후에도 몇 번 그런 일이 있었고 전부터 느끼던 것이었지만, 항상 좋은 가르침을 주는 사람들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상대의 무지를 책망하지 않으면서, 짐짓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무엇보다 상대의 영역을 존중한다는 데 있다.
대학생 때 한 시론 강의 시간에 나는 교수님이 쓴 윤동주 시인에 대한 논문을 읽고 당돌하게 시의 해석이 잘못되었다며 수업이 끝나고 찾아간 일이 있다. 시 연구로 수십 년을 보낸 교수님께서 이제 갓 학부생이 된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 대뜸 자신의 논문에 토를 다는 일이 황당하고 화가 날 법도 한데, 시론 교수님은 '그렇구나. 이런 해석도 가능할 수 있겠지.'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리곤 되려 진지하게 자신의 해석에 대한 내 생각을 물어왔다. 그 일만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그래도 그 덕에 나는 교수님에게 강의실에서는 배울 수 없는 귀중한 것을 배웠다.
영화 <대부>에 얽힌 소소한 해프닝처럼 나 역시 어떤 부분에서 실수를 했다는 걸 독자의 제보로 뒤늦게 알게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전문가에게 지적을 받기도 하지만, 제대로 가르침을 아는 사람치고 '그런 것도 모르다니, 당신 실망스럽네요'라고 몰아붙이는 사람은 없다. 다만 잘못된 것은 수정이 필요하니, 상대의 영역을 부수지 않는 선에서 영리한 조언을 건넨다.
친구 중에 거의 습관적으로 내게 이런 말을 자주 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내가 그건 잘 모르지만~', '네가 더 잘 알겠지만~' 이라거나 '어쩌다가 본 건데~'라는 식으로 운을 떼며 내가 잘 모를 만한 정보를 넌 저시 알려주곤 했다. 그리고 말을 끝맺을 때는 항상 '~하지 않겠나?', '~지 않을까?' 라며 의견을 확정 짓지 않고 상대가 스스로 답을 낼 수 있도록 의문형으로 결론을 열어둔다.
사실 친구의 이 같은 언어 습관은 상대를 배려한다는 점에서도 좋은 관계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지만 그 자신에게도 유용한 방패가 되어준다. 실로 우리가 온 힘을 다해 세상을 배운다고 해도 깊숙한 속내까지 속속들이 알기란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시인 박남철의 <하이데거의 릴케論아!>와 같은 시를 읽어보면, 화자인 시인이 릴케론의 번역본을 읽고서 원문을 그대로 읽지 않은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 내용이 나온다. 번역 전문가의 실력을 믿고 그들이 전해준 지식을 따라 읊기는 했으나 결국 하이데거가 직접 독일어로 쓴 걸 이해한 것만 못하다는, 그런 자괴감을 표현한 시로, 비단 시의 화자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언제나 지식에 대한 잘못되거나 뒤틀린 접근을 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무지의 고백'을 전제한 대화의 기술은 상대가 실수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빌미를 주어 배려를 할 수 있게 만들 뿐만 아니라, 내가 처한 불확실한 지식의 상황에서도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 공수전환이 완벽한 만능열쇠 같은 방법을 아는 사람들은 항상 서로를 상처 입히지 않으면서 더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든다.
가르치는 일도, 배우는 일도 생각해보면 결국은 성장을 위해 하는 일이다. 진정 가르칠 줄 알고 배울 줄 아는 사람은 그 행위가 가져올 성장에 대해 논하지만, 그저 으스대거나 상대를 멸시할 목적으로 배우거나 가르치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작게는 당장의 의사소통이 끝나며, 길게는 사람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말 한마디, 댓글 하나에서 시작하는 작은 언행이지만 그 작은 행동과 선택들이 어떤 파급력과 가치를 지니고 있는 지는 성장할 잠재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안다.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관심을 갖고 지켜야할 일이고, 그저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도 이 '우아한 세계'를 가꿔나갈 필요는 있다.
인생의 어느 순간 서로를 헐뜯는 긴장감 넘치는 세계에서 상대를 공격하고 방어할 생각에만 찌든 피곤한 나날 속에 있을지, 아니면 부족한 점을 서로 봐주면서 함께 성장하는 우아한 세계에 있을지, 어느 쪽이 좋은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