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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민 Oct 26. 2024

나이 차이


가끔 내가 옛날에 써둔 노트나 메모들을 보면 재미있는 글귀나 발상이 많은데, 한날은 옛 노트를 뒤적이다가 이런 주제를 발견했다. 바로 '나이가 들수록 나이 차이가 무의미해지는 원리'라는 주제.


생각해보면 내가 대학 생활을 할 때만 하더라도 분명히 한두 살 차이 나는 사람일지라도 교통정리는 확실하게 했었던 것 같다. 한 살 많아도 형이었고, 빠른 년생이었어도 형이고 선배였다. 갓 대학에 입학했을 때 졸업을 앞둔 선배들은 엄청 나이가 많아 보였고, 어쩌다 대선배를 만나게 되면 다 큰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많다. 지금 생각하면 이제 겨우 스물다섯 남짓한 청년들인데 말이다.


그런데 나이가 서른을 넘기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보면 그때부터는 사실 나이가 크게 중요한 요소가 되진 않았다. 사회에서는 나이보다는 더 중요한 게 그 사람이 가진 경력이나 직업이고, 어떤 경험을 얼마나 했으며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나아가 인품이나 덕성, 통찰력과 안목을 살쳐볼 뿐 한두 살 차이는 그저 다 동료고 네다섯 살까지도 사실 그렇게 크게 나이 차이를 느끼지는 않는다. 호칭이나 언어도 대개 나이 상관없이 존댓말을 하기에 의사소통의 괴리가 생기지도 않는다. 그래서 아주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개인의 인적 사항은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되는데, 내가 이렇게 느낄 정도이니 어르신들은 더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한 가지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수록 나이 차이는 덜 느껴지는데 그 이면에 어떤 원리가 숨어있지 않을까. 내가 노트에 적은 내용은 그런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예컨대 50살과 51살의 어른이 서로 만나면 사실 나이 차이가 의미가 없을 정도지만, 1살과 2살 아기에게 나이 차이는 자기 나이에 대비해 최소 50%나 될 만큼 크게 느껴진다. 똑같은 1년이라도 쉰 살의 어른에게는 50번이나 반복해온 시간이고, 한 살배기 신생아에게는 인생 전부와 맞먹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신생아는 그래서 '몇 살' 나이보다는 단위로 '몇 개월'을 쓰고 또한 영유아 교육 과정에서 몇 개월 차이가 꽤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도 나이에 관해서는 영유아가 어른에 비해서 그 겪는 정도가 심각할 정도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만약 누군가 '어, 우리 5살 차이네'라고 말한다면 실제 현실에서 그 다섯 살 차이는 진짜 5년의 시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른과 신생아의 나이 차이에 대한 비교는 극단적이긴 하지만, 좀 더 현실적인 나이대에서도 이 공식은 성립한다. 비교하려는 대상과 나이 차이가 얼마든 간에, 내 나이가 많아질수록 상대방에게서 느끼는 나이 차이는 점점 희미해진다. 쉽게 말해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나이 차이가 의미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20대에 본 40살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 같았다면, 30대가 되고 나서는 40대가 같은 세대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재미있는 건 나이 차이를 상쇄하는 힘은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더 강하고 젊은 사람일수록 약해서, 젊은 사람들은 나이 든 사람과 절대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나이 든 사람들은 조금만 극복하면 젊은 사람과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이 차이가 문제가 되는 건 대개 이쯤에서 시작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이 차이의 티핑포인트(Tipping point, 급변하는 지점)는 상대방과 나 둘 중 한 명이라도 나이 차이가 자기 나이의 100%를 넘어서는 순간인데, 나이 차이가 내 인생보다 긴 시간이라면 내가 경험해보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논해야 할 때도 온다. 역사나 문화 같은 배워서 얻는 그런 이야기들 말고, 진짜 눈으로 보고 듣는 경험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힘들다.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2015 영동고속도로 가요제' 에피소드에서 1993년생 가수 아이유가 박명수와 퀴즈를 풀다가 '황영조'를 몰라서 당황하는 장면이 나온다. 황영조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영웅으로 전 국민의 응원을 받았던 마라토너지만 그건 아이유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다. 역사라고 하기에는 부족하고 시대상이라고 하는 그런 일들은 겪지 않으면 모를 수밖에 없다. 마치 요즘 아이들이 '박지성이 누군데요?'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반대로 나이가 많은 쪽도 무에서 유를 끌어내기는 힘드니 공감대가 막히는 부분이 많아질 것이다. 설령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시절을 대학생의 시선으로 느끼는 것과 초등학생의 시선으로 느끼는 것 역시 당연히 큰 괴리가 있다. 적어도 내가 학생일 때 상대방도 학생이었어야 하고, 내가 특정 직급의 직장인일 때 상대방도 비슷한 직급의 직장인이었어야 한다. 혹은 그렇지는 않더라도 경험의 교집합이 제법 커야만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 공식은 정량적인 부분만 보여줄 뿐, 개개인의 속사정을 정확하게 반영하지는 못한다. 나이가 많아도 경험이 적거나, 나이가 어려도 경험이 많을 수도 있으니까. 경험의 질적 측면, 개인의 시간 활용과 성향에 따라서 이런 나이 차이에 대한 지각은 충분히 다 다를 수 있다. 내 또래 중에서도 어른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어른들 중에서도 내 또래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건 다시 말하건대, 물리적으로 넘을 수 없는 경험이나 성장의 양을 이해나 배려로 보정했기에 가능한 것이지, 천성적으로 타고날 수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왜 나이 차이에 대한 고찰을 노트에 써두었는지 그 동기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왜 이런 생각을 써두었는지는 짐작이 간다. 살면서 나이 차이 때문에 벌어지는 몇 가지 오해들이 불편하다고 해도, 어쨌든 이 세상은 온갖 나이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기 때문이다.


'나는 저 사람과 나이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절대로 어울릴 수 없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어울려야만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고, 반대로 '나는 저 사람보다 나이가 많아도 충분히 친구처럼 지낼 수 있어' 라며 잘 대해주려다 불편함만 살 수도 있다. 그런데 나이 차이에 대한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극복이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 서로 잘 이해하고 배려할 비책이 있다면 이 수많은 이익관계로 얽힌 복잡한 사회를 좀 더 순탄하게 살아낼 방법을 하나쯤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KBS 다큐 <다큐 공감>에 출연한 우원기 흉부외과 전공의는 의대생 시절에 '열심히 공부해서 치료만 잘하면'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막상 병원에서 일을 해보니 그것만큼 중요한 일이 있었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아픈 환자들이 고령이 많은 것은 당연할 테고, 젊은 의사가 나이 많고 심리적으로 위축된 환자를 대하려면 그 환자들이 공유하는 시대나 가치 등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냉혹한 '공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불가능함이 한데 모여 이 세상을 이루고 있다면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에 가깝다. '나이 차이'는 타인을 이해하는 가장 기초적인 이해의 장이지만 그조차도 수많은 이해의 괴리와 노력이 필요하듯이 어떤 이질적인 가치들 역시 충분한 이해의 과정을 지나면서 보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듯이, 나이 차이 같은 것들은 절대로 가감이 안 된다. 어쩌면 개인의 신념이나 의지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든 바꾸려다가 꼭 사달이 나곤 한다. 그런 점에서 이해는 그게 가능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기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틀즈의 유명한 노래 'Let it be'처럼 일단은 '그냥 둬라'는 건 바꿀 수 없는 것들은 놔두고 그다음 사태를 보자는 뜻일 게다.


나도 점점 나이가 드니까 언젠가는 '공식에 따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생길 거고, 또한 누군가에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될 거다. 비단 나이뿐만이 아니라 내가 인생을 살면서 쌓는 어떤 견해나 생각들도 어느 시점에는 단단한 고목처럼 변해서 쉽게 흔들리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숲이라는 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 잎을 펼칠 수 있을 때 비로소 생명과 활기가 넘치는 공간이 된다. 


결국 우리의 이해란 상대를 완벽히 이해했다고 착각해버리는 일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미지의 영역이 줄기를 뻗어와도 내어줄 수 있는 공간을 조금씩 마련해두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 공간을 우리가 '그릇'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릇이 커서 나쁠 건 없잖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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