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부자들>(2015)을 보면 몰락한 장필우가 뉴스를 보며 'X나 고독하구만'이라고 읊조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냥 쓸쓸하다거나 외롭다고 해도 됐을 텐데 왜 굳이 장필우는 그 상황에서 '고독하다'는 말을 꺼냈을까.
사전을 찾아보면 고독과 외로움, 둘 다 명사고 뜻도 비슷하긴 한데, 사실 이 두 단어 모두 '홀로 남아 쓸쓸한 느낌'의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어서 구별이 쉽지는 않다. 그런데 이 자주 느끼는 두 감정이 비슷하지만 뭔가 확실히 다르다는 걸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잘 구별이 되지 않으니까 대충 의미를 얼버무리고 아무 때나 혼동하지만, 고독과 외로움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걸 잘 구별해야 인생을 혼탁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기분 나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 고독한데 외로움을 해결하는 방법을 쓰다가 더 고독해지고, 외로운데 고독을 해결하는 방법을 쓰다가 더 외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고독과 외로움의 차이점은 뭘까. 내 생각에 이 둘의 결정적인 차이는 다음과 같다.
먼저 쉽게 구별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타인이 해결해 줄 수 있다'면 그건 외로움이고, '타인이 해결해 줄 수 없다'면 그건 고독이다. 더 자세하게는, 관계나 사랑에서 비롯되는 인간 본능과 관련한 추동이 외로움이고, 이상이나 과업의 성취 같은 자아실현과 관련된 추동이 고독이다.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고독과 외로움의 관계는, 마치 음식물 섭취와 수분 섭취의 관계와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둘 다 입을 통해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고, 부족할 때 똑같이 허기를 느끼게 되고 심하면 죽음에 이르게 되지만 그렇다고 부족한 부분을 해결하려 반대로 행동했을 때는 증상이 더 악화되는 걸 지켜보게 된다. 수분이 부족한데 배가 고픈 걸로 착각하고 라면을 먹으면 만성탈수가 오고 반대로 너무 배가 고픈데 포만감에 물배만 채우면 더 기운이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고독과 외로움도 마찬가지로, 고독한데 사람들과 만나며 그 허기를 달래려고 하면 실제로 채워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고독의 원인은 해결되지 않아서 왠지 사람들을 만나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고 더 공허하고 허기진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외로움 역시 그걸 고독으로 착각하고서 정신 수양이나 명상 같은 일로 잊으려고 하면 자꾸 인스타그램을 들춰보고 싶고 남들이 잘 놀러 다니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질투하거나 때에 따라 그걸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화까지 나기 마련이다.
고독과 외로움은 인생의 대부분을 홀로 있게 되는 인간의 삶에서 반드시 채워나가야 할 무한한 허기와도 같다. 생명을 식사와 마실 것으로 해결한다면 정신은 우리가 고독과 외로움을 잘 구분하고 적절히 충만한 것들을 채워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홀로 남아 쓸쓸한 기분'이 드는 고독과 외로움의 공통적인 감정이 솟구치면 먼저 그걸 구별할 필요가 있겠고, 구별이 되었으면 적절한 행동으로 허기진 정신을 채워줘야 되겠다.
먼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쓸쓸한 감정을 타인이 채워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걸 고독이라 판정했다면, 고독이 필요로 하는 일을 해야 한다. 고독이 찾아왔을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평소에 일상에 치여서 미뤄왔던 것들을 실천할 때가 바로 그때다.
운동 전문가가 되는 꿈이 있었다면 운동을 하러 가야 한다. 작가의 꿈이 있었다면 글을 쓰러 가야 한다. 자아실현과 관련한 결핍은 오직 그걸 행할 때 말고는 채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오히려 고독의 순간에는, 적극적으로 시간을 확보하고 혼자 그 시간을 독점할 필요가 있다. 아니면 사람을 만나더라도 자신이 추구하는 뭔가를 배울 수 있는 사람, 혹은 그러한 행위를 같이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반면 외로움이 느껴져서 책을 읽거나 혼자 여행을 떠나도 도저히 이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면 그건 사랑과 관계를 갈구하는 인간 내면의 본능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사람들과 만나 교류를 하거나 활동적인 뭔가를 해야만 한다.
사람은 본래 사회적 동물이라 무리 지어 소속되려는 습성이 있고, 제아무리 외골수라고 한들, 어느 정도는 소속감이나 유대감을 느끼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자손을 이어 대를 잇고자 하는 에로스적 본능은 어떤 경우에라도 사랑을 갈구하게 만든다. 그럴 때는 다른 '고독'은 일단 치워두고 외로움이 지시하는 방향대로 사람과 사람이 대화하며 느끼는 감정, 함께 여행하며 느끼는 소소한 일상, 혹은 사랑하고자 하는 설렘과 사랑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마땅히 감당하는 수고와 사랑에 이르렀을 때 느낄 그 모든 감정들에 충실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정도는 고독의 영역에 있고, 또한 동시에 외로움의 영역에 있으므로 단칼에 '나는 지금 외로움이야'라거나 '나는 지금 고독이야'라고 딱 잘라 말하기가 힘들 때도 있다.
사람이 그리우면서도 동시에 치워두었던 꿈을 이루고 싶기도 한, 모순되지만 양가적 감정을 느끼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기 때문에 그런 중첩된 상태에 있는 '양자 인간'의 모습에 빠지더라도 혼란에 빠지거나 당황할 필요는 없다.
고독과 외로움이 중첩된 상태라고 할지라도, 개개인이 처한 무수한 상황에 따라 대개는 스스로 무엇을 먼저 취해야 하는지 답을 알고 있다. 예컨대 공부를 하던 사람이 고독과 외로움을 동시에 느낄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고독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 이때 고독을 해결하면 외로움도 해결할 수 있지만, 외로움을 해결한다고 고독을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충분히 성공했거나 일에 치여사는 사람이 외로움과 고독을 동시에 느낀다면 아무래도 고독보다는 외로움을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 경우에는 외로움을 해결해도 고독을 해소할 방법을 계속 찾을 수 있지만, 고독을 해결한다고 외로움이 가시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밖에 고독과 외로움의 균형이 정말 절묘해서 어느 것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자기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고독이나 외로움을 해소했을 때 반대쪽을 해결할 수 있는지를 뒤집어 생각하다 보면 결국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안다.
다만 어떤 경우라도 문제가 되는 것은, 고독이든 외로움이든, 그 자신이 처한 쓸쓸함을 부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다.
내 마음이 분명히 고독이나 외로움을 외치더라도, 그 사실을 외면하거나 애써 부인하려고 든다면 좋은 방법이 있어도 끝끝내 우울과 슬픔의 문을 열고 무엇 때문에 문을 열었는지도 잊어버리는 그런 악순환에 놓일 테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 결국은 고독과 외로움을 극복하는 데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게 '혼자 있을 때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솔직할 수 있느냐'일지도 모른다.
고독과 외로움은 인생의 모든 순간에 시시각각 다른 질문을 들고오는 난처하지만 꼭 마주쳐야할 과제다. 괴롭다는 이유로 방치해두면 인생을 앗아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될 수도 있지만, 질문을 잘 대면하고 적절히 헤쳐나가기만 한다면 오히려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극복하고 충만한 삶으로 나아갈 지름길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쓸쓸한 두 감정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걸 지각한 것만으로도 절반은 넘은 셈이고, 고독한가, 외로운가, 내 마음 속이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무엇을 실천할지 결심할 용기만 갖고 있다면 나의 충만함은 물론이고 타자의 허기까지 보살필 수 있는, 종래엔 단단한 자아를 갖게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