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막이가 끝나면 어찌 됩니까? 용상에 앉아있는, 용안을 꼭 빼닮은 그 자 말입니다."
폐위될 위기에 처한 왕비가 그동안 자신을 감싸주던 왕이 대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까.
영화 <광해 : 왕이 된 남자>(2012)를 보면 말미에 정체가 탄로 난 광대 하선에 대해 묻던 중전이 그의 사후처리를 도승지에게 묻는 장면이 나온다. '용상에 앉은 저 천한 것을 그냥 살려둘 수는 없지 않겠소?'라는 살벌한 임금의 전언을 이미 전해 들었지만, 도승지 허균은 차마 고해 올리지는 못하고 묵묵부답으로 결과를 들려준다.
왕과 사대부들 간의 피 말리는 정쟁에서 일어난 작은 해프닝으로 치부하거나, 살벌한 왕가 권력 쟁탈전 속 으레 일어날 법이라며 무시하고 지나갈 법도 하지만, 중전은 비천한 광대의 안위를 걱정한다.
어찌 보면 자신을 속이기도 했고, 귀천이 있는 신분 사회에서 천 것이 고귀한 자신과 말을 섞었다는 것만으로도 불경하게 여길 수 있음에도 그런 것을 신경 쓰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가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해주었기 때문일까?
법이나 제도, 때로는 암암리에 묵인되는 규칙과 관행까지 행동의 근거로 삼을만한 명분은 세상에 얼마든지 널려있지만, 실제로 마주하게 되면 불편한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전쟁을 예로 들어보자. 모든 전쟁은 그 이면에 국가 간의 알력이나 정치적인 이유가 있어 합당한 이유로 시작됐다고 해도 전장의 참호에서 실제로 군인들이 보게 되는 광경은 끔찍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잔인한 살육과 처절한 생존 투쟁의 연속에서 그걸 즐기는 사람도 없고, 명분이 있다고 해서 기분 좋게 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광해>의 하선 역시 이미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음에 굴레에 뛰어든 불나방과 같은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죽음이 '그렇지! 저 사람은 원래 죽을 팔자인데 뭐' 하며 갑자기 편안하게 받아들일 성질의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오히려 고귀한 혈통으로도 하지 못한 일을 일개 필부가 해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행동에 은혜를 입게 됐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중전은 보답조차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더 한심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살다 보면, 마음이 참 따뜻하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어떤 사안을 바라볼 때 응당한 명분이나 이성적인 논리가 있어도 그 결과 너머를 보는 심안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저 따뜻한 말이나 행동,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애써 배우거나 위조할 수도 있으며 순간의 마주침이 끝나면 사라져 버릴 것들이다. 그러나 사태가 끝나고 당사자들이 겪게 될 일을 짚어보는 마음은 한순간에 생기지 않는다.
드라마 <킹덤>(2021)에 등장한 어리숙한 동래부사 조범팔은, 줏대 없이 아첨꾼의 말에 휘둘려 잘못을 저질렀으나 백성을 소모품처럼 여기는 그의 백부와는 달리 사태의 뒷일을 계속해서 걱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처음 동래를 빠져나갈 때부터 말미에 세자의 무리를 소탕하라는 중전의 명을 수행하는 순간까지 그는 사태 이후를 바라보며 내적 갈등에 시달린다. 그가 비록 최초로 큰 잘못을 저질렀고 종종 세자에게 위험한 일을 저지르긴 했으나 결국 세자의 편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마음씨 덕분이었다.
타인에게 닥쳐올 사태를 예견하는 마음은, 일찍이 맹자가 '군자의 인'이라며 예찬한 적이 있다. 제나라의 선왕이 제사에 올릴 소가 슬피 울며 끌려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양으로 바꾸라고 한 것을 백성들이 비웃자, 맹자는 그것이야말로 군주의 참된 도리라고 간언한다. 소를 양으로 바꾸면 양이 죽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의식을 중단하지도 않을 거면 그 행위에 의미가 있느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비명을 두 눈으로 보고 있는 순간에도 마음에 조금도 변화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소름 끼치지 않는가.
더불어 맹자는 소와 양을 바꾸는 행위를 '할 수 없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의 차이로 더 명확하게 설명해 준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맨몸으로 바다를 건너 다른 나라로 건너가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다 큰 어른이 나뭇가지 하나를 꺾는 일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하지 않는 것이다. 제사는 지내면서도 제물만 바꾸라는 왕의 마음은 혼자서 어쩌지 못할 일을 아는 것과 할 수 있는 일의 분별에 가깝다.
가령 우리가 먼 곳에서 일어난 부조리함을 일일이 찾아가며 따질 수 있는가. 그러나 세상에는 분명히 우리가 모르는 부정하고 타락한 일들이 분명히 일어나고 있음을 알지 않는가. 그런 일들은 내가 어찌할 수 없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서 마음의 언짢음을 느낀다면 그것은 인한 마음이 살아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인한 마음이란 대체로 타자에게 닥쳐올 후일의 사태를 우려하거나 걱정하는 마음에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여의도에서... 안산까지?"
돈이 없어 여의도에서 안산까지 걸어간다는 알리에게 대중교통을 이용하라며 만 원을 건네는 상우
종종 인터넷이나 유튜브를 보다 보면 죽을 위기에서 구조된 동물들을 신고자가 입양하거나, 지갑을 잃어버려 돌아갈 길이 막막해진 학생에게 선뜻 차비를 내어주는 등의 미담 사례를 접하게 된다. 장담컨대 그런 행위를 한 사람들 중 대단히 정의로운 삶을 살거나 항상 온정 넘치는 따뜻하고 상냥한 얼굴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대부분은 무표정하게 하루 일과를 끝내는 평범한 소시민일 것이며 때로는 비겁하거나 무기력함에 빠지기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라면, 눈앞에서 벌어진 불편한 사태에 대해 처지가 절박해진 사람들의 앞날을 마치 없던 일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하거나 최소한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며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들은 더더욱 약자나 암울한 사태에 대해 조롱하거나 비웃지 않으며, 가슴에 떨어진 무게추의 무게를 한껏 느낀다.
어찌 보면 드라마 <오징어 게임>(2021)에서 가장 냉철하고 냉혹하게 보이는 상우가 의외로 따뜻하게 느껴지는 까닭도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 차비가 없어 30km를 걸어가겠다는 알리의 말을 그냥 넘어가지 못한 것, 오합지졸 팀과 끝까지 함께한 것, 그리고 결국 기훈에게 자신의 모든 걸 넘겨준 것을 보면 말이다.
넷플릭스의 단편 시리즈 <러브, 데스+로봇>(2022)의 '메이슨의 쥐' 편은 냉혹한 이성의 세계에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란 어떤 모습일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낡고 오래된 농장에서 농사지으며 살아온 메이슨은 그가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고 있던 창고의 쥐떼 문제를 해결해 줄 첨단 AI 로봇을 들이는 계약을 한다. 처음에는 곡식을 갉아먹는 쥐떼를 소탕하는 일이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든 알 바 아니라는 태도로 로봇을 투입하지만, 나중에 그는 로봇이 매우 잔혹한 방법으로 쥐를 소탕하고 있는 걸 눈치채고 생각을 바꾼다.
동료를 살리기 위해 로봇에게 죽을 걸 알면서도 돌진하는 쥐들을 보던 메이슨은 마음의 불편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내 샷건을 가지고 와서 그가 쏴버리는 건, 창고의 들쥐가 아닌 빨간 눈을 치켜뜬 로봇이다.
머리로만 이해하던 일을 실제로 바라보게 될 때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은 참상을 거절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 능력은 상대의 내일을 헤아려 보는 인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우리가 이 어지럽고 냉담하기 짝이 없는 사회에서 온갖 종류의 불행이 닥쳐오는데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서로의 사정을 미루어 짐작하는 마음이 공유되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이성이 허락한 파괴의 세계에서 무언가 언짢음을 느끼는 사람들을 보았는가. 혹은 나 자신이 그러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의 주위는 아직까지 따뜻한 온기가 미치는 곳, 한겨울에 폭풍이 몰아쳐도 잠깐 쉬어갈 수 있는 작은 산장이 있는 곳이다.
파멸과 불행에 대해 그 이유보다는 본질 자체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주변에 둘 수 있다면, 혹은 나 자신이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세상이 비록 황량해도 아주 팍팍하지는 않을 것이다. 행위나 생각보다도 더 가까운, 마음의 본질로부터 느끼는 그 깊은 지점에서부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