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엔 재밌는 문화가 있다. '언제 밥 한번 먹자' 하면 그게 진짜 다음에 식사를 하자는 말이 아니라 그냥 인사말이라는 것. 언젠가 유퀴즈에 출연한 배우 임시완이 그 말을 진짜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잘 분간하지 못해서 선배들을 당혹스럽게 한 적이 있다는 고백을, 나도 가끔은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 곧잘 이 문제를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정말로 내가 그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그걸 핑계 삼아서라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임시완 배우가 선배들을 당혹스럽게 했다고 해도 스스로 만나려는 의지가 있으니 그런 희박한 인사말이라도 건너뛰고 그를 향해 달려간 게 아닐까. 만약 누군가에게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면 어쩌면 나 자신이 이미 그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우연찮게 마주친 한 선배에게 '멀리 떠난다'고 했을 때 선배는 재밌다는 투로 '과한 게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하기야, 자동차로 30분이면 건너갈 수 있는 옆 도시로 돌아간다는 게 멀리 떠나는 것은 아닐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졸업 후에 그와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공간적으로는 멀리 떠나는 것이 아닐지 모르겠으나, 대학 선후배라는 성긴 관계에만 묶여있던 그와 나 사이는 멀리 떠나고 있는 게 맞았다.
이후로 10년이 흘렀지만 나는 그 선배의 생사도 모른다. 자동차로 10년 동안 달릴 거리는 지구 두 바퀴에 해당하는 머나먼 거리다. 무슨 유감이 있거나 안 좋았던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보통 사람의 관계가 그렇다. 관계는 사실 이성보다는 감성에 맞닿아있는 문제여서 어느 한쪽이 원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소멸하기 마련이다.
나도 한때는 친구를 만들어 보려고 부단히 애를 썼던 적이 있다. 대학생 땐 내향적인 성격을 사람 사귀기 좋은 타입으로 바꿔보려고 온갖 대외활동도 하고 피곤한 모임이 있어도 억지로 참석했던 적이 있다. 사람을 상대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 아르바이트로 대면 업무를 하거나 때로는 북새통에서 소리 쳐가며 물건을 팔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점점 더 확신에 차는 건 단지 사람을 많이 만나고 친해지려 하는 게 내게는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혹자는 '사람을 많이 알면 도움이 된다'라고 하지만, 도움이 될까 싶어 유지한 관계는 그 계산식에서 이익이 빠져버리면 곧장 끝나는 위태로운 관계로 유익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도 그런 관계가 오래가는 걸 본 적도 없다.
내게도 남자들이 말하는 소위 '부X친구'라는 것도 있었고,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며 친목을 도모하는 그룹도 있었지만, 정작 내가 10년째 교우관계를 맺고 있는 몇 안 되는 친구들은 가장 유난을 덜 떨었던 부류에 속한다. 결이 맞아서도 아니고, 하는 일이 비슷해서도 아니고, 취향이 같아서도 아니다. 자연히 서로가 궁금해졌을 뿐이다. 그 궁금증엔 어떤 취향이 반영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확실한 건 오래가는 관계는 억지로 이어 붙인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은 인상(印象)이라는 걸 가진다.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면 마음속에 절로 떠오르는 생각들이다. 삶을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현실 속에서 내보인 태도 같은 것들이 한데 모여 아우라를 자아내는 것이다. 분위기라고도 하는 그것을 우리는 오랜 시간 바라볼 필요도 없이 한두 번의 대화만으로도 직감할 때가 있다. 그런 일치의 순간은 만들어보자고 해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만남으로 적층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것을 확인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무엇이 서로가 추구하는 인상이고 그 인상이 언제 어디에서 일치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 경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뿐이다. 자연스럽게 서로 인상 깊은 사람이 되거나, 배우 임시완이 그랬던 것처럼 내게 인상 깊은 사람에게 얕은 인과의 관계라도 뛰어넘어 말을 건네는 것이다. 자연스럽거나, 자연스럽게 찾아온 상황을 한번 쥐어보거나 할 뿐인 게다.
사실 친구를 만들려는 노력은 그 노력 자체가 피곤하고 힘들다기보다 친구가 없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데서 더 큰 고통이 따른다.
우리가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타자에 대한 기본 예의나 매너 등을 단기간에 습득할 수는 있어도 인생이 담긴 그릇인 인상 자체를 완전히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친구를 만들어 보겠다고 사람 좋은 얼굴로 웃는 연습을 하면서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은 다 꾸미며 살다 보면 그저 '만들어낸 관계'만 많이 생길 뿐이다. 그마저도 내가 연습하고 만들어 냈던 것들이 사라지면 없어질 관계로 말이다.
눈치챘겠지만 타자와 인상이 일치할 확률을 높이려면, 차라리 나 자신에게 관심을 쏟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물론 내 삶에 쌓여온 것들과 길이 너무 달라져서 친구가 되지 않을 사람들도 그만큼 많이 늘어나기는 할 것이다. 예컨대 집안에 틀어박혀 하루 대부분을 고양이처럼 웅크려 글이나 쓰는 내가 미식축구 선수와 친구가 될 일은 거의 없다고 본다. 그러나 혹자는 작가의 삶에 호기심이나 인상을 받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소수의 사람들 중 몇몇은 내게 오랜 친구가 되어있는 것이고, 아닌 경우에 적당히 관계를 맺다가 흩어질 뿐이다.
내가 추구하는 세계를 보다 정교하게 가다듬다 보면 나의 인상도 절로 그렇게 정교해진다. 그리고 그 깊이가 깊어질수록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가까이 지내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깊은 관계를 얻고 싶다면 오히려 상대에게 맞추기 위한 에너지를 소비하기보다 나 자신의 인생을 더 알차게 가꾸는 것이 더 유리할 수 있다. 관계의 에너지는 '결국 만나게 될 사람'을 위해서 아껴두고, 그때 실컷 써도 늦지 않다.
그리고 대체로 내가 원하는 사람은,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을 때 주변에 모이기 마련이다. 커뮤니티에선 종종 한 분야의 우상을 만나려고 그 자신이 그 분야의 장인이 되어 같은 공간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성덕(성공한 덕후)'이라는 말을 쓰는데, 내가 성덕하는 사람이 될 수도, 성덕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사람, 어떤 분야든 방법은 다양할지언정 그 전제 조건이 '내가 그곳에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건 변함없다. 윤리나 도덕, 지식과 취향 같은 무형의 가치 역시 마찬가지다. 시정잡배가 젠틀맨을 만날 수는 없는 법이고, 초등학생이 교수와 어울릴 수는 없는 법이니까. 이런 여러가지 요소를 조합해 스토리가 들어있는 삶의 아우라를 만들어 내면 비로소 그것이 타자에게 다가올 인상이 된다.
그러니 친구를 만들자고 애쓰지 말고 '만날 사람은 어차피 만나게 돼있다'는 가벼운 마음을 갖되 인생의 자부심을 가지고 사람들 속을 누비자. 반드시 누군가는 당신만이 설명할 수 있는 남다른 삶의 아우라에 궁금증을 가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