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관상>에서 김종서의 천거를 받아 마침내 궁에 입궐한 김내경은 왕을 대면한 첫자리에서 왕에게 쓴소리를 듣는다. 관상을 보는 일이 누군가의 재능과 장점을 발견하고 이를 북돋워 주는 일에 쓰인다면 모를까, 치부를 들춰내어 상대에게 근심과 고통을 주는 용도로 쓰인다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것이다.
『논어』를 읽으면 ‘군자는 타인의 장점을 드러내고, 소인은 타인의 약점을 드러낸다’라는 정확히 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이건 꼭 관상가만 들어야 할 소리도 아니고 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글 역시 양날의 검과 같아서 같은 단어라도 어디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의도와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미생>에서 안영이가 재무부장에게 당돌하게 반려된 사업에 관해 물어보러 갔다가 대차게 거절당하고 다시 반성하러 간 장면에서 그녀는 사업을 추진하는 영업팀의 입장과 재무부의 입장을 단어 의미의 차이를 들며 설명한다. ‘가능성이 있다’라는 말은 사업을 추진하는 영업부의 입장에서는 그 자체로 희망적인 말이지만 예산을 집행하는 재무부의 입장에서는 ‘좀 더 따져봐야 한다’는 말이 된다. 마찬가지로 ‘긍정적이다’라는 말은 영업부의 해석과는 달리 재무부에서는 ‘아직 결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와 같은 뜻이 된다.
말의 차이가 가져오는 오해를 좀 더 살펴보자. ‘손이 부드럽다’는 말은 누구에게 하느냐에 따라 칭찬이 될 수도, 모욕이 될 수도 있다. 예컨대 손 모델에게 손이 부드럽다고 한다면 이는 부드러운 손이 주는 이미지로, 손의 모양새에 신경 써야 하는 모델의 입장에서는 칭찬이 될 수 있다. 그런데 UFC 파이터에게 손이 부드럽다고 한다면 이는 ‘물주먹’과 같은 모욕이 될 수 있다.
단순한 단어도 이럴진대, 구와 절을 이루고 나아가 문장, 한 편의 단락, 그리고 한 편의 글이 되는 순간의 문자는 어떤 의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그것이 칼인지, 방패인지 완전히 다른 성격의 것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어떤 글은 방패인 척하는 칼이 될 수도 있다.
말과 글이 위험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매사 신중하게 발언한다. 언어는 실존하는 칼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강도나 폭력배가 와서 칼을 휘두른다면 그걸 보고서 피하거나, 도망가거나, 애초에 그럴 위험이 짐작되면 방검복을 입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말과 글은 피하는 게 불가능하다. 일단은 보고 들어야 하지 않는가. 한번 읽거나 들은 뒤로는 뒤로 물릴 수가 없다. 의미는 그대로 전달되고, 컴퓨터 파일 삭제하듯이 기억에서 버튼 하나 누르면 삭제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그 말은 있는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 안에 기생하면서 말의 의도가 종용하는 대로 제멋대로 형태를 바꾸기까지 한다.
얼마 전 주변에서 꼭 보라고 해서 봤던 화제의 <나는 솔로> 16기를 보면서 느낀 감정 역시 결국 사달을 내는 건 말이라는 점이다. 날것의 사실을 자신의 직관과 감정에 따라 살을 입히고 전하는 과정에서 단어 선택에 따라 완전히 다른 말이 전해진다. '지금까지'와 '오늘까지'라는 말도 발화의 시점과 상황에 따라 한 가지의 의미를 180도 뒤튼다.
나이가 젊은 사람들은 인생의 경험을 충분히 쌓지 못한 상태에서 불쑥 치솟는 감정을 말로 풀어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실수도 하고 실언도 하지만, <나는 솔로> 16기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만도 않다. 인생 전반전을 한 바퀴 둘러본 30~40대의 어른들도 실언을 하기는 매한가지니까.
문제는 왜 사람들이 말의 위험함을 알면서도 애써서 삼키고 자꾸 전달하려느냐에 있다. 내 생각에 그것은 자기 자신이 괜찮은 사람인 것을 증명하려는 심리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험담이나 실언을 자주 하는 사람들도 그 전제는 '나는 아니지만'이라는 생각을 깔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걸 적극적으로 항변하기 위해서 더욱더 타인의 약점이나 부족한 점을 들춰내는 경우도 있고, 가스라이팅을 통해 관계의 우열을 정하고 지배하기 위한 경우도 있다. 그래도 이 경우에는 목적이라도 분명해서 금방 그 진위를 알 수 있지만, 단순히 자신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포장지'로써 말을 와전하거나 의도를 섞는 사람은 더 큰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 자신이 무슨 과오를 저지르고 있는지 스스로 지각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뿐더러, 설령 알고 있다고 해도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라는 과제를 수행하려면 일단 자신의 언행에 결함이 없어야 한다. 결함이 발견되면 인지부조화에 빠져 스스로 최면을 걸기 시작하고 잘못을 아무 관련도 없는 타자에게 전가하기도 한다. 지각 있는 사람이 재빨리 이들의 허점을 눈치채고 바른말을 하게 되면 결국 이들은 견디지 못하고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일으킨다. 그게 말싸움이 됐든 진짜 주먹싸움이 됐든 간에.
혹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언행이 잘못된 것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진짜' 좋은 사람의 행동을 기꺼이 하겠다면 그건 적극적으로 권할 만한 것이겠지만 '좋은 사람인 척' 하는 말과 행동은 거짓과 날조까지 동원하는 위험한 행위를 할 수 있기에 멀리하라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마치 '좋은 사람이 된 것처럼' 그런 분위기만이 중요하다. 잘못된 정보의 전달, 상대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는 부적절한 의도 따위가 낳는 결과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한두 번이야 인정받고 싶은 인간의 본능이 작용했다고 치고 넘어갈지도 모르겠지만 자꾸만 이런 언행이 반복되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쯤은 의심의 눈초리를 켜볼 필요가 있겠다. 사실 진짜 좋은 사람들은 애초에 그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숙지하고 한계를 미리 알려주며 그로써 겸손까지 갖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소위 그 좋은 사람들이란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애써 포장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는 기준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그걸 실천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타자에게 자신의 행동이 좋게 보일 것에 대해 큰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말을 즐겨 듣고, 어떤 말을 하는 사람들을 가까이해야 할까. 언어가 위험하다고 해서 모두를 의심하며 척지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은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고 자기 발전을 이루려면 말과 글을 보고 듣기는 해야 한다.
베스트셀러『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의 저자인 채사장은 그의 또 다른 저서에서 친누나에게 세상은 썩어빠졌다는 식의 비관조를 내뱉자 '사람이 변했다'는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세상이 썩어빠졌으니 뭘 해도 안 된다는 식의 말을 듣고 무슨 희망이나 의욕을 갖겠는가. 상황은 부정적이지만 돌파구가 있을 것이라는 암시라도 있어야 사람은 해낼 수 없는 일도 잠재력까지 끌어와 해내는 법이다.
인지심리학자 김경일은 타인의 말을 들을 때 '당신 잘 될 거야'를 전제로 까는 사람과 '당신 잘 안 될 거야'라는 전제를 까는 사람의 차이를 주목하라고 한다. 사실 <나는 솔로> 16기에서 벌어진 상황들도 대부분은 벌어지지도 않은 상황을 '안 될 것'이라고 단언하는데서 시작한다.
A : 우물을 파려면 삽도 필요한데 지금 우리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삽부터 찾아보자.
B : 우물을 파는 건 좀 힘들지 않겠어? 괜히 힘만 낭비될 테니 그늘에 앉아 쉬자.
한번 우물을 파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똑같이 부정적인 말이라도 다음 A와 B의 말은 뉘앙스가 완전히 다르다. A는 현재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해결이 가능한 것을 전제로 깔고 대안을 제시하지만 B는 처음부터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단정 짓고 목표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우물 파기'라는 목표를 가진 사람에게 어느 것이 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말일까. 우물을 파 본 사람이 권하는 삽이라는 도구를 찾는 것이 나을까, 그늘에 앉아 쉬는 것이 나을까.
같은 상황을 두고도 일이 되게끔 조언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과는 관계없는, 오히려 맥을 빠지게 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고 꼭 해내야만 하는 일이라면 의지를 꺾기보단 용기를 주는 사람이 더 가까이할 만하지 않을까? 그것도 막연히 가벼운 응원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필요한 것들을 함께 의논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진 사람과 말이다.
사람 좋은 얼굴로 그 자신의 인품을 알아달라고 하면서 원하는 일은 '잘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다가오는 사람을 경계하는 건 비단 영화 <관상>의 임금뿐만이 아닐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용기를 주는 인간'이 있다면, 바로 그런 사람이 우리가 마땅히 가까이해야 할 사람이자 언어의 근원 아닐까. 이 고난과 역경이 가득한 세상, 함께 헤쳐나갈 궁리만 해도 하루가 빠듯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