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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민 Oct 26. 2024

미움받을 용기에 관하여


작년 한 해는 여러모로 나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예전에는 잘 나가는 연예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공황장애가 찾아왔다면서 활동을 중단해 버리는 게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뭐 하는 거야?' 같은 생각은 기회가 간절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할만한 생각이니 말이다.


그런데 어느날 내 글 하나가 온라인에 퍼져 난자당하고 있을 때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논란이 있을 법한 주제라고 여기곤 있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더러는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을 해대고 있는데 아무리 멘털이 튼튼한 사람이라도 그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며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뒤숭숭하게 지내다 주변에 이런 이야기를 하니 그 반응이 의외였다. 대체로 그런 신호를 부정적으로 보기보단 좋은 징조로 받아들이라고 하는 게 아닌가.


영화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2014)를 보면 갓 월스트리트에 입성한 조던 벨포드가 경제지 인터뷰에 응했다가 매우 부정적인 어조로 기사가 난 걸 확인하게 된다. 한참을 열받아하면서 아내에게 푸념을 늘어놓던 그는 '그것도 다 노이즈 마케팅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말을 듣는다. 못 미더운 표정으로 반신반의하던 조던은 다음날 자기 회사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사람들은 그가 변두리에서 페니 스탁을 팔던 못된 방법에 주목한 게 아니라 돈을 쓸어 담은 그 비법만을 주목한 것이다.


사실 내 지인들의 조언대로 나는 욕을 그야말로 죽도록 많이 먹었지만 반대급부로 글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결국 욕을 먹더라도 숨은 지지자들을 만날 수 있다면 화제를 끌어모으는 능력도 능력은 능력인 것이다. 선거판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네거티브 선전전이 난무하는 것도 그런 선상에 있다.


공개된 장소에서 글을 쓰다 보면 논쟁에 휩싸이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작년뿐만 아니라 예전에 나는 마블 영화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때 비판조의 기사를 썼다가 엄청난 비난을 마주한 적이 있다. 더러는 내 개인 블로그까지 찾아온 사람들과 댓글로 피곤한 논쟁을 벌여야 했지만 나는 할만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했고, 우직하게 내 뜻을 밀어붙였다(결국은 내 말대로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경험은 내가 비슷한 논쟁이 있을 때 그걸 버틸 수 있는 체력을 길러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작년에 나는 벌써 글이고 뭐고 울면서 집에 갔을지도 모른다.


니체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시장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오직 시장 사람들의 말뿐'임을 강조하면서 '정령들이 속삭이는 세계'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비단 니체의 말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어떤 이야기든 프로타고니스트가 있으면 안타고니스트가 있기 마련이고, 메마른 숲이 작은 불씨로도 언제든지 거대한 산불이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사건, 사고가 곳곳에서 터지기 마련이다. 그런 걸 수습하는데 온 정신을 쏟으면서 나를 소모하고 있으면 진짜로 해야 할 일은 언제 해야 하나? 가끔은 부정의 세계도 무신경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고, 그게 자연스러운 것임을 받아들일 필요도 있다.


나는 '시간이 약이다'라고 하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거라 믿고 그저 무방비로 서있으면 가드를 내린 권투선수가 상대에게 녹다운을 당할 때까지 얻어터지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일단 링을 내려가라. 링을 내려가도 당분간 시합은 계속될 거고 상대선수는 내가 나 대신 세워둔 샌드백에 계속 주먹을 휘두르겠지만 링 위에서의 일일 뿐이다. 복수심을 가지고 칼을 갈러 가든, 반성의 의미로 반쯤 풀린 신발끈을 다시 동여매든 간에 링 밖에 나가 제 할 일을 하라는 것이다.


잠깐 오해가 있을 듯 하니 말해두지만, 이건 무책임하게 모든 걸 회피하라는 게 아니다. 할 만한 일을 했음에도 비난이 쏟아질 경우에 그 비난을 덮어두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는 이따금 손흥민 선수의 경기를 보곤 하는데, 논란 한 번 일으키지 않은 그 손흥민 선수조차 잘못한 게 없는데도 매주 엄청나게 많은 비난을 받는다. 단지 슛을 못했거나 공을 한두 번 놓친 것을 가지고 말이다.


나는 미움에 관한 사람의 모든 감정을 배고픔이나 성욕과 같이 매우 근원적이면서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활동을 해도 '잘 보이려고 그런 게 아니냐? 위선적이다'하는 소리를 듣는 게 미움의 속성이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한쪽이 튀어 오르면 눌러서 평형을 유지하려는 인간의 본성이 자리 잡고 있다.


배고프니 식당이 있고, 소변이 마려우니 화장실이 있는 것은 당연한데 미움은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가 식당에 하루 종일 앉아 허기가 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듯이, 소변을 해결하고도 화장실에 눌러앉아 다음 신호를 기다리고 있지 않듯이, 미움이 온다는 걸 당연히 받아들이고 적당한 곳에 미움을 둔 뒤에 그곳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미움받을 용기는 미워하는 감정을 이해할 때 시작되고 그보다 중요한 게 무엇인지 깨달을 때 나타난다. 엄청나게 욕을 먹었으면서도 결국 글을 써 내려간 내가 그러했듯, 중요한 건 다음에 더 한 걸음을 옮길 수 있느냐의 문제지, 발자국을 잘 남겼는지 자로 재고 있는 게 아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한다'라고 한 니체적 의지는 미움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니 미움받고 있다면 그건 오히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봐야 할 때다. 가만히 서서 그 무게가 나를 짓누를 수 없도록,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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