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생>(2014)을 보면 인턴 PT를 앞둔 장그래가 한석율에게 '내 상사를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며 주먹을 날리는 장면이 나온다.
입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상사를 모독하지 말라는 장그래의 모습에 한석율도 어처구니없었겠지만, 보는 시청자도 의아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설령 오래 본 사람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장그래의 행동에 대해 우리는 의문을 갖는 동시에 '나를 위해 주먹을 날릴 만큼 애쓸 사람이 주변에 있을지', 혹은 '내가 생판 남인 누군가를 위해 주먹을 날릴 수 있을지'도 생각하게 된다. 과연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나를 모독했다고 상을 엎어버릴 사람이 가족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알고 보면 각박한 세상이어서, 원래 피도 눈물도 없는 게 타인의 심정이라서, 스스로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고 다짐을 해도 상처받는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매 순간 저마다의 이유로 상처받으며 살고, 그게 꼭 자기 실수나 의도적인 어떤 행동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사회는 개인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할 분명한 영역들이 있으며, 그 영역들은 오랜 관습의 결과, 지식의 적층, 부의 차이 등으로 세분화되어 소속에 끼지 못한 인간들을 서로 무수히 밀치며 상처 입히는 장미덩굴과 같으니 말이다.
막상 서러운 일을 당하게 되면 주변을 둘러보게 되지만 생각보다 더 냉담한 사람들의 태도에 더 상처받는다. 하지만 곧 그게 외면한 사람들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그저 도와줄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혹은 주고받은 것이 없었거나 깊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그저 상처에 딱지가 앉을 때까지 고통을 인내하는 수밖에 없다.
더 극단적으로는 프란시스칸 대학교 졸업 연설에서 루 홀츠가 했던 "내 고난을 주변에 말하지 마세요. 90%는 관심도 없고 10%는 기뻐할 겁니다"라는 말을 실감하거나, 영화 <국가부도의 날>(2018) 마지막 장면에서 선량한 얼굴을 지우고 "아무도 믿지 마"라며 자기 공장 외국인 노동자에게 폭언을 쏟아내던 갑수의 모습처럼, 스스로 잔혹한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하기까지 한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에 등장하는 주인공 지안 역시 구원을 바라지만 구원이 없는 세계에서 스스로 가시가 되겠다고 선언한 사람이다. 변명의 여지없이 살인자로 낙인찍혀버린 그 자신에게서 어떤 가치를 발굴해내지 못한 채 짓이기는 대로 짓이겨지고, 또 그런 너덜너덜한 상태로 그 자신도 타인의 약점을 찾아 물어뜯는 잔혹한 세계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그런 그녀도 동훈의 일상을 엿듣다가 우연히 동훈이 가족의 복수를 하러 간 장면에서 눈물을 흘린다. 나이 들어 인생의 고배를 마신 동훈의 형들은 백수로 늙은 어머니의 눈칫밥을 먹는 게 싫어 작은 청소집을 차려 일하지만, 한날은 한 건물주에게 갑질을 당하며 멀찍이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무릎을 꿇는 설움을 겪는다. 뒤늦게 형들이 당한 수모를 알게 된 동훈은 분노하며 과일바구니를 들고 건물주에게 찾아가 '망치'를 꺼내 들고서 그에게 말한다.
"나도 무릎 꿇은 적 있어. 뺨도 맞고. 욕도 먹고. 그 와중에도 다행이다 싶은 건, 우리 가족은 아무도 모른다는 거. 아무렇지 않은 척, 먹을 거 사들고 집으로 갔어. (중략) 내가 무슨 모욕을 당해도 우리 식구만 모르면 아무 일도 아니야. 근데 어떤 일이 있어도 식구가 보는데서 그러면 안 돼."
그리고 동훈은 난데없이 건물주의 사무실에 있는 벽을 있는 힘껏 내리치며 건물의 구조를 분석하는데, 화를 내는 건물주에게 자신이 '구조기술사'라며(동훈의 직업이 하필 구조기술사인 데는 '주변 사람 구조의 달인'이라는 해학적 의미도 있다) 불법 증축한 증거를 가지고 고발하기 전에 과일바구니를 들고 형과 어머니에게 찾아가 사과하라고 말한다.
지안이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트라우마를 간접적으로 치유하는 계기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동훈의 행동이, 자신의 형이 힘없고 가난한 소시민이어도 그를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강자 앞에 찾아가 싸움을 걸고 화를 내는 모습이 유달리 달라 보였을 것이다.
사람들의 말대로 내 고난에 열의 아홉은 관심도 없고, 나머지 한 명은 오히려 기뻐하는 게 세상이라면, 나를 위해서 망치까지 들고 가 싸울 사람은 얼마나 귀한 사람인가. 또 그 사람은 그런 힘든 일을 할 만큼 얼마나 나를 끔찍이도 아끼는 것일까.
우리가 살면서 여러 가지 고난을 겪고, 또 그 고난 앞에서 주변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보게 되지만 꼭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나를 위해 화낼 줄 아는 사람'이다. 그건 꼭 동훈처럼 내가 당한 걸 갚아주겠다며 망치를 들고 가는 극단적인 모습일 필요도 없다. 적어도 '넌 절대 하찮은 사람이 아니야'라고 오히려 나를 깔보는 세상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그런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아무래도 나한테는 자폐가 있으니까..."
"(모두 들으란 듯이)야! 장애인 차별은 법으로 금지돼 있어! 니 성적으로 아무 데도 못 가는 게 차별이고 부정이고 비리야. 무슨 수로 왔든, 늦게라도 입사를 한 게 당연한 거라고!!"
나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내가 당한 수모에 같이 화를 낸다. 아니, 오히려 그 자신이 수모를 덮으려고 하면 더 길길이 분노하며 자기라도 나가서 싸우겠다고 한다. 주먹을 날리거나, 망치로 벽을 때려 부수거나, 직장에서 창피를 무릅쓰고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는 것이든 간에, 드라마에서 묘사된 것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자신의 수고와 손해까지 감수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더 분노하는 건,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 자신이 스스로를 비하할 때다. 남들이야 사정을 모르니 아무런 막말이라도 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의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자신이 스스로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며 '남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망가뜨리게 하는 꼴을 '화를 내는 사람들'은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 이 사람들은 내게도 화를 내며, 그 화가 불태우려고 하는 건 내 속에서 자라나는 음울의 씨앗과 불행을 몰고 오는 생각들이다.
사람들의 불편한 반응에 '나는 자폐아니까'라는 말로 도피하려는 우영우를 다그치는 최수연 변호사의 분노가 꼭 그와 같다. 그래서 나를 위해 화를 내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도 좋은 보답이지만, 그들에게 가장 좋은 보답은 스스로 세상의 부정한 기운을 떨쳐내고 분노를 표시한 사람들의 분노가 정당한 것임을, 증명시켜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보답이다.
나를 위해 화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귀한 일임을 알고, 또한 그들을 그럴 수 있게 만든 나의 가치를 다시 되돌아보는 일. 그걸 깨닫지 못한다면 귀인들의 분노도 한낱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수밖에.
그러니 좌절할 일이 생기고, 나 대신 화를 쏟아내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고마워하되 스스로 그 가치를 깨닫고 일어서야만 한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화를 내 줄 사람'을 찾는 것보다는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편이 더 낫고, 세상 일은 돌고 도는 지라 언젠가는 내가 그 자리에서 누군가를 위해 화를 낼 수도 있어야 한다.
그게 나에게 진심을 보인 이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일이고, 이 험한 가시덤불 같은 세상 속에서 이 고마운 사람들을 구할 나만의 새로운 방주가 되지 않겠는가. 서로가 서로의 높은 파도를 부술 배가 되어 인생이라는 기나긴 항해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