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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민 Oct 26. 2024

인간관계? 아니죠, '인간소유'죠.


"나는 온라인 소개 사이트로 아내를 만났습니다. 프로필에 이렇게 적었죠. '눈이 하나뿐인 의대생으로 사회성이 떨어지고 학자금 대출이 14만 5천 달러나 있다.' 아내는 제게 메시지를 보냈죠. '제가 찾던 남자네요'라고요. 내 솔직함이 맘에 들었던 겁니다."


영화 <빅 쇼트>에서 투자자들에게 온갖 욕과 비난을 들어가면서도 막대한 수익을 올린 마이클 버리는 펀드를 접으면서 자기 얘기를 담은 메일을 투자자들에게 보낸다. 공부하고, 분석하고, 셈하고, 예측하는 일 말곤 다른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그가 어떻게 아내를 만났는지 말이다. 시장의 흐름을 읽고 큰 수익을 내는 안목을 가졌던 만큼 마이클 버리는 그 자신의 미래까지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족을 만들고 싶지만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 하지만 그의 아내는 솔직하게 자기 사정을 털어놓은 마이클 버리에게 끌려 결혼까지 하게 된다.


삐딱한 마음을 먹고 바라보면 그래도 '의대생'이니까 결혼한 게 아니냐 싶을 수도 있지만, 사실 마이클 버리의 고백에 들어있는 핵심은 그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걸 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떤 좋은 관계는 서로 도울 수 있을 때 더 빛을 발한다. 마이클 버리의 아내는 다른 건 몰라도 이 남자가 자기 잘난 맛에 살면서 아내의 도움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며 무기력에 빠뜨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봤을 것이다. 

아내의 예상대로 마이클 버리는 그 자신이 부족한 부분이 뭔지 정확히 인지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아내에게 기댄다. 극의 초반부에 면접을 보러 온 신입 직원 앞에서도 '아내가 이렇게 하라고 하더라'며 사교성이 부족한 자신의 성향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도 도움을 받는 것에 충분한 가치를 부여한다. 마이클 버리가 억만장자가 되었어도 그의 아내는 여전히 그에게 중요한 사람이고, 아내는 처음부터 이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게다.


여기서 마이클 버리와 그의 아내가 맺은 건 '관계'가 맞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기댄 모양을 나타내는 '사람 人'자처럼, 관계는 사람을 보고 맺는다. 하지만 때로 사람들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어떤 면면만을 취해서 가지고 싶은 욕구, '소유'하고 싶어 한다.


"민 대위 지금 우리 딸이랑 같이 있다. 그럼 나랑 우리 딸만이라도 따로 부탁하자. 민 대위 내가 다음에 확실한 건 하나 추천해줄게."
이기적인 캐릭터인 석우는 결국 가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는 흥미진진한 캐릭터지만 어쨌든 시종일관 '밥맛'으로 묘사된다.


영화 <부산행>에는 주인공 석우가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 KTX 열차에 갇히자 대전역에 도착하기 직전에 휴대폰을 꺼내 '민 대위'라는 인물에게 그 자신과 딸만 방역에서 제외시켜줄 것을 따로 부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간절한 심정으로 부탁은 하고 있지만 실상 그의 휴대폰에 저장된 민대위의 위치는 '개미들' 칸이다.


업신여기면서도 막상 필요한 때가 되니 찾는 석우나, 안 된다고 하면서도 석우가 '좋은 건수' 추천한다고 하니 틈새를 만들어주는 민 대위나, 서로가 서로에 대해 관계를 맺는다기보다는 소유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석우는 군에서의 역할로 민 대위를 소유하고, 민 대위는 자산을 불릴 도구로서 석우를 소유한다. 과연 이 두 사람이 직장이나 어떤 혜택을 벗어던지고서도 그 '관계'가 유지될까. 그건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나마 '인간소유'의 현장에서도 사람의 능력을 가지고 재단하는 경우라면 차라리 삶의 거친 부분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아예 본격적으로 값을 놓고 흥정하기 시작하면 거기서는 이제 인간성 따위는 찾아보기가 힘들어진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익현은 조폭소탕작전 때문에 쫓기는 김판호 앞에 웬 전화번호부를 펼쳐 보이며 '10억짜리' 전화번호부라며 자기는 체포될 일이 없다고 호언장담한다. 무슨 다이아 가루로 만들어서 전화번호부가 10억 원이나 할 리는 없고, 그동안 그가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에게 뇌물을 먹여 '수집한 인간'이 10억 원어치나 된다는 소리다. 


정치인들이 비자금 문제로 대중들의 뭇매를 맞을 때마다 공개되는 녹취록이나 무슨 메모를 보면 그게 꼭 영화 속 일이 아닌 건 이젠 대중들에게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인간관계든, 인간소유든 무슨 상관인가. 그것도 다 능력 아닌가'라고.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만약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한 가지는 명심해야 한다. '너 그거 감당할 수 있겠냐?'


드라마 <미생>을 보면 인턴십 때 내세울 학력도 배경도 없는 장그래를 시종일관 무시해왔던 깐족이 상현은 결국 최종 입사에 실패하고 훗날 장백기를 만나 장그래의 험담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말한다. "'우리'가 '우리'로 남아있으려면, 대기업을 가야 한다고요."


상현은 명문대에 어학연수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생각했고 자기는 대기업에 걸맞은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인턴십부터 벌써 대기업 직원이라도 된 마냥 행동했다가 막상 떨어졌는데도 대기업 사원이 된 장백기를 붙잡고 어떻게든 '동류'라는 인식을 심으려고 노력한다. 사실 대기업 직원이 되는 게 개인적으로 뿌듯한 일일 수는 있지만 그게 그렇게 무슨 명패처럼 걸고 다닐 일도 아니고 상현처럼 생각하는 게 당혹스럽기도 한데, 문제는 이제 그 사람이 자기 기준을 맞추려고 무슨짓이든 마다하지 않고 인지부조화에 빠지게 된다는 점이다.


예전에 나는 전문직 시험을 치겠다면서 벌써 전문직 종사자가 된 것처럼 행동하며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을 '수준 이하' 취급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일단, 그 사람이 그토록 원하는 전문직 종사자를 나도 몇 번 만나봤지만 실제로 그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고, 설령 그런 게 현실이라고 한다한들, 그 자신이 그럴 깜냥이 되고 나서 해야 할 일 아닌가.


단기적으로는 인간을 소유하는 행위가 어떤 이익을 가져다 줄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소유'의 현장에 뛰어드는 사람은 우선 그 자신이 먼저 '물건'이 돼야 한다. 그걸 스스로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가치를 올리려고 아등바등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돈을 버는 것도, 명예를 얻는 것도, 권력을 잡는 것도 어느 것 하나 쉬운 건 없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물화하고 소유하려는 욕구는 역설적으로 더 커진다. 줄을 긋고, 계층을 나누며, 어떻게든 영역 안에 들어가서 특권을 만들어 누리려고 한다. 놀랍게도 그건 그 영역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바라는 일이어서 상현처럼 '마음만 일류'라는 태도로 타자를 비하하기도 한다. 이건 어떻게 보면 선민의식의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밖에서 보면 평범한 소시민 같던 사람들도 갑자기 갑질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이유도 이런 과정 속에서는 납득이 된다.


일단 자기 자신을 '물건'으로 만들기로 결심한 사람은 사방팔방을 가치로 나누고 값을 매기느라 분주한데 정작 성공하는 사람들은 사실 그런 일에는 관심도 없고 진득하게 '관계'를 맺어가며 자기 목표에 전념한다. 무명논객 제갈량을 받아들인 유비나, 외딴섬에서 일론 머스크와 스페이스 X를 창립한 그윈 샷웰과 브렛 존슨 같이 역사를 돌아봐도 훌륭한 군주 옆에는 십수 년을 헌신한 충직한 참모가 있고, 성공한 사업가들도 허름한 창고에서 일을 하던 시절부터 함께 꿈을 꾸던 좋은 파트너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걸 심심찮게 본다. 


'이상적인 인생이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는 건 너무 힘들지만, 그래도 사람의 삶이 탄생과 죽음이라는 일생의 영역에서 자기가 가진 것을 평가하고 평가받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누군가를 소유하고 싶다는 건 결국 나 자신도 물건이 돼야 한다는 소리고, 물건이 된다는 건 평가되고, 소비되고, 버려지는 일회성의 고단한 궤적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과 같다. 


당연히 그런 삶은 늘 불안하고 피곤에 찌들어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익과 불이익이라는 손익계산서 앞에서 하루 종일 계산기를 두드려야 하기에 진심을 마주할 겨를도 거의 없게 된다. 가치가 떨어질까 불안해하면서도 때로는 돼먹지 못한 짓을 해도 항변할 길이 없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건 막상 물건이 된 사람들이 '이제 그만 물건이고 싶다'고 해서 관둘 수가 없다는 거다. 법, 평판, 규칙, 온갖 사회적 작용과 그 자신이 만들어놓은 기준에 걸려서 그걸 버리기 위해서는 그전보다 더 크고 위험한 결심을 해야 하니까.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연애 프로그램들을 들여다보면 '인간관계'와 '인간소유' 그 사이에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을 프로그램에 녹여내고 있다. 입주하는 과정에서 이름을 제외한 어떤 정보도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 사실 요즘은 직장은 물론이고 얼굴 외모까지 데이터화 해서 값을 매겨 중매결혼하는 게 낯선 풍경이 아닐 정도인데, 연애 프로그램은 대놓고 정반대의 길을 간다.


연애가 사치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없다면 남의 연애라도 보자'는 마음들이 연애 프로그램의 인기를 견인하고 있지만서도 실은 그 이면엔 인간성이 물화되어가는 세계에서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들의 근원적인 바람이 들어있다. 스스로 물건이 되려고 자청한 경우도 많지만 어쩔 수 없이 '인간소유'의 장에 빠져버린 이들도 적지 않기에 그런 사람들에게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나 '사람 외 공개 금지'라는 연애 프로그램의 규칙은 반갑게 다가왔을지 모른다. 순수하게 이별과 사랑이라는 인간 대 인간이 관계를 맺으며 벌이는 감정에만 집중한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열렬한 호응을 보내고 있는지도.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소유당하는 사람의 문제일 것이다. 인간관계를 어려워하거나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면 사실 그건 인간관계가 아니라 이미 인간소유의 장으로 빠져있는 건지도 모른다. 내게 무슨 이점을 기대하고 접근하거나, 이점이 없기에 냉대와 무시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처음부터 그런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 그럴 때 인간소유를 청산하는 방법은 사실 간단하다. 제일 앞에서 언급했던 마이클 버리의 고백처럼 솔직하게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그대로 보여주면 된다. 만약 '관계'를 맺으려 했는데 어떤 오해가 있었다면 당신의 불능 상태를 돕거나 인정하고 차선을 모색할 테고, '소유'를 하려 했는데 당신의 약점을 바라본다면 알아서들 떠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건, 내가 치부를 드러낸다고 해서 그렇다고 스스로 가치 절하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건 '나는 이런 건 잘 하지만, 저런 건 잘 못해'와 같은 식이어야 한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있었는데도 남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인간관계'를 논해봄직하다.


그러니 일단은 우리가 의문스러운 '인간관계'의 현장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이게 관계인지 소유인지 구분해야 하는 것이고, 그다음은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인간소유'를 멈추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내가 '인간관계'를 포기하며 살 일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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