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투르는 극중에서 얍삽한 캐릭터로 묘사되지만 사실 누구보다 '바이러스 펜'을 갖고 싶어 하는 순수한 청년이었다
만화 <둘리>의 고길동이 불쌍하게 보이면 어른이 됐다는 소리도 있지만 내게는 영화 <세 얼간이>가 꼭 그랬다.
학생 때는 이 영화를 처음 보고 나서 '배움'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엎어주는 란초의 모험담이 짜릿하게까지 느껴졌지만, 한 편으론 그의 적대자이자 경쟁자로 등장하는 차투르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 영화를 다시 보고 생각해 보면 차투르가 란초라면 치를 떠는 것도 이해가 된다. 차투르가 그저 가르쳐주는 것을 그대로 암기하고 시키는 것만 따라 하는 로봇과 같은 학습법으로 인생을 산다고 해도 그것 역시 인생을 살아가는 그만의 방법이 아니던가. 순위와 명예만 좇는 교육의 문제도 화끈하게 부숴야 할 것이기는 하지만, 란초가 꼭 그런 식으로 차투르를 골탕 먹여야 했는지, 그것도 의문이다.
극중 내용만 보면 란초가 차투르를 직접적으로 괴롭히는 장면은 없다. 다만 란초가 너무 똑똑한 나머지 그렇게 자유분방하게 지내고도 항상 과 수석을 하는 바람에 차투르가 만년 이인자가 되어서 시무룩해지는 것 말고는 마찰을 빚을 일이 없는데, 도화선이 된 사건은 대학 총장이 란초의 친구 라주를 란초에게서 떼어내기 위해 기숙사 방을 옮긴데서부터 시작한다.
란초는 라주를 어떻게든 다시 '배움의 장'으로 이끌기 위해서 차투르를 나락에 보낼 야심 찬 계획을 세운다. 그것은 교육부 장관이 학교에 찾아왔을 때 학생 대표로 연설을 하게 된 차투르의 연설문 내용의 몇몇 단어를 심한 말로 바꿔버리는 것이었다.
란초는 차투르가 한눈 판 사이에 연설문의 '헌신'이란 단어를 '강간'이라는 말로 바꿔버렸다. 힌디어를 잘 모르는 차투르는 평소 하던 대로 그냥 연설문을 외우기만 하면 된다면서 뜻을 생각도 안 하고 란초가 바꿔버린 연설문을 외워서 읽게 되고, 결과는 상상하던 그대로 차투르에게는 최악의 하루가 된다.
결국 그날밤 란초의 아지트에 찾아와 차투르는 울면서 왜 그랬냐고 따지지만 란초는 그저 웃으며 '암기식 공부법이 나쁘다는 걸 알려주려고 그랬다'며 지금 다시 보면 소름 끼치는 말을 한다.
우간다 출신으로 평범한 인재는 들어오지도 못할 인도의 명문 공대에 입학해 성공을 꿈꾸고 있던 대학생에게 란초가 저지른 일이 과연 쉽게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갈 만한 일이겠는가.
증오와 복수심에 불탄 차투르는 유리 조각을 들어 아지트 벽면에 날짜를 새겨놓고 10년 뒤에 누가 더 성공하는지 보자며 란초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마는데, 그나마도 차투르가 멱살잡이도 하지 않고 승부를 걸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진짜 착한 건 차투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평소에 조금 재수 없게 굴기도 하고 성적 앞에서 한없이 쪼잔해지는 차투르라고 하지만, 그건 단지 사람의 성격이나 삶의 방식의 문제였을 뿐이다. 인생의 치명타가 될지 모를 그런 형벌을 받을 이유가, 혹은 란초가 그런 응징을 할 자격이 있었을까. 아무리 '진정한 배움'이라는 '대의'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본 <세 얼간이>가 더 소름 끼치게 여겨지는 부분은 결말에 이르러 정점에 다다른다. 영화의 도입부이기도 하지만, 나중에 정말 꽤 성공한 차투르는 자신의 성공을 자랑하기 위해서 먼저 란초의 친구들을 찾아가 10년 전에 했던 내기를 겨뤄보자며 란초의 행방을 함께 찾아갈 것을 종용한다.
차투르는 유망 기업의 부사장이 되어 큰 저택과 슈퍼카, 예쁜 아내와 자식까지 얻었다며 란초의 친구들에게 자랑을 늘어놓고서 나중에 란초가 무슨 학교 선생님이 되었다는 소식에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좋아하지만, 그에게는 더 큰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란초의 행적을 쫓는 내내 차투르는 자신이 '푼수크 왕루'라는 세계 최고의 과학자와 계약을 앞두고 있다면서 그 계약만 따낸다면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성공을 할 수 있다며 으스대곤 했다. 그런데 끝내 라주, 파르한과 함께 란초와 만나게 된 차투르는 자신이 그토록 신성시하고 중요한 계약을 해줄 '푼수크 왕루'라는 사람이 란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란초에게 루저라며 실컷 떠들어 댄 뒤에 그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된 차투르는 계약이 어그러질까 봐 그 앞에서 '팬티 쇼'까지 보여주지만 란초가 후에 그의 곤경을 구해주었는지는 영화 속에 묘사가 되지 않고 끝난다(뉘앙스로 봐서는 '바이러스 펜'을 돌려주면 계약을 해주기는 했을 것).
정리해 보면, 차투르는 란초에게 큰 수모를 당하고 10년 동안 고군분투해서 나름 성공을 거두었는데, 실은 끔찍이도 싫어하던 란초는 더 큰 위인이 되어있었고 심지어 자신의 생사여탈권까지 손에 쥐고 있는 인물이 되어있었다는 것. 더구나 차투르는 가명을 쓰지 않았으니 란초는 차투르가 애써서 찾아오지 않았어도 처음 그가 계약서를 내밀었을 때부터 결말을 알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
끔찍한 일을 당했고, 복수를 하려 했더니 상대가 더 강해져서 내가 빌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상황. 어른이 되어서 보고 나면 이것만큼 또 끔찍한 상황이 있을까 싶다.
비록 차투르가 인간적인 면에서는 큰 호감을 사는 사람이 아니었을지언정, 인생을 성실한 자세로 살아가려 했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가 없지 않나. 란초와의 악연 때문에 극중에서는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로 일관하지만 실은 그도 자기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며 살았을 뿐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에게 마지막까지 녹록지 않았다.
결국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순수하게 학문을 즐기라는 게 란초의 중요한 조언이라면, 그의 말마따나 이 영화에서 항상 주목받는 란초가 아닌 차투르의 삶도 응원할 만한 것이 아닐까?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고, 혹독한 노력과 성실함을 보여주는, 그러면서도 매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차투르의 삶을 과연 빌런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차투르의 시점에서 다시 보는 <세 얼간이>는 과연 잔혹동화라고 해도 무방할 섬찟함을 안고 있긴 하지만, 그러나 이 영화의 성격이 그러하듯 차투르에게도 분명배울 점은 있다.
너무도 뛰어난 천재 앞에서 복수에 실패하고 더러 더 큰 수모를 겪지만, 그래도 살아가기 위해 수모를 떨치고 앞으로 달려가는 차투르의 삶.
어른이 된 지금 나는 그런 차투르의 삶도 다시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