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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민 Oct 26. 2024

평온의 대가


매년 여름이면 어머니는 제사를 지내야 하니 장을 보러 가자고 하신다. 나는 얼굴을 본 적조차 없는 외할머니의 기일을 챙기는 것인데, 어머니가 외동딸인 까닭에 매해 직접 제례를 올린다.


과거에 외할머니가 안 좋은 일로 돌아가셨다는 것은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다. 한때 전국민적인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신경숙 소설가의 『엄마를 부탁해』(2005)를 읽다 보면 '잃어버린 엄마'에 대한 묘사가 잠깐 등장하는데, 한 목격자의 '웬 치매 걸린 노인이 앙상한 손으로 길바닥에서 상한 김밥을 먹고 있더라'는 증언에 주인공인 딸이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이 외할머니의 이야기와 겹쳐 가끔씩 생각나곤 했다.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엄마.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떠돌며 고통받고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원망. 언젠가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어머니에게 그 책을 권하며 대략적인 줄거리를 읊어줬을 때도 어머니는 그 책만큼은 '못 읽겠다'며 한사코 거절했는데 아마 외할머니에 관한 마지막 기억이 떠올라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제사를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기일뿐만 아니라 명절에도 약소하나마 제사를 지내고, 어려웠던 시절에도 외할머니 제사만큼은 빠지지 않고 지냈으니 그 정성이 얼마나 각별한지.


하지만 나는 종종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제사를 그만두면 어떻겠냐고 권하곤 했다. 유명한 절에 봉양을 맡기고 기일이 되면 절에 찾아가 인사드리고 오자고 말이다. 내가 미신을 믿지 않고 무신론자여서, 아니면 기억에도 없는 사람을 기리는 일이 낯설어서가 아니라, 그저 제사를 쉬고 연휴 기간에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여행을 다니거나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으면 해서였다.


제사상을 준비하는 것은 내가 도우면 될 일이니 큰 문제는 아니지만 제사가 끼면서 항상 명절 연휴가 어중간해진다는 점은 아쉬운 것이었다. 기일은 그렇다 쳐도 설이나 추석 같은 대명절에 연휴가 생겨도 명절 당일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면 아무래도 장기 여행 같은 것을 계획하기는 힘들잖은가. 하지 않으면 모르되 귀찮다고 제사를 앞당기거나 늦게 지내는 건 차라리 지내지 않는 것만 못하니 시간을 바꿀 수도 없으니 말이다. 


지금이야 우리가 별일 없는 하루를 지내고 있지만 사실 이 '별일 없는 하루'를 만들기 위해서 나와 어머니는 갖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어머니도 이제는 움직일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은 곳을 둘러보고 싶다고도 하고, 그러니까 적어도 명절 연휴에는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받는 시간으로 만들면 어떨까 했다.


리처드 탈러의 저서들을 읽다 보면 '이콘(Econ)'에 대한 묘사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콘은 경제적 사안에 대해서 항상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인간 부류를 일컫는 말이다. 만약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콘이 등장한다면 어떨까. 이콘은 분명히 제사에 들이는 노력과 비용, 시간을 아껴서 더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고 종용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의 입장은 이 차갑고 냉철한 이콘의 생각과 같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리처드 탈러의 연구는 사실 '모두 이콘이 되어보자!'는 것이 아니다. 결국 우리가 이콘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어떡하면 인생을 더 윤택하게 만들 수 있을지 그 결정을 내리게 할 동기를 찾는 게 그 골자라고 할 수 있다.


하루는 운전 중에 어머니와 문득 제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예절이니, 의무니, 하는 고리타분한 이유가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이유에 대한 어머니의 진짜 속내를 알 수 있었다. 


그저 제사를 지내야만 일 년 동안 마음이 편하다는 것.


딴청을 피우는 이콘을 불러 세우고 다시 물어본다. 마음이 편하려면 어떤 대가를 얼마나 내야 하나. 이콘은 가성비나 효율성을 따질 수는 있어도 마음에 대한 계산은 하지 못한다. 합리적인 가격에 나온 중고차를 두고 담배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신차를 덜컥 구매해 버리는 사람을 이콘은 이해하지 못한다. 번개 맞을 확률보다 낮은 로또 종이를 들고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는 직장인들을 이콘은 이해하지 못한다. 운세를 보는 사람도, 선물을 하는 사람도, 손 편지를 쓰는 사람도 모두 이콘은 이해하지 못한다.


제사를 지내지 않고 유명 관광지에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거나 불안하다면? 더구나 그게 일 년에 한 번뿐이어서 일 년 내도록 찝찝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과학적 근거를 갖고 무슨 정신의학적인 치료를 병행해서 그런 느낌들을 지울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게 과연 제사 한 번 지내는 것보다 '효율적'이고 바람직한 것일까?


이승우 소설가의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마음의 부력」(2021)을 읽으면 주인공과 죽은 형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매번 같은 내용의 전화를 걸면서 형의 돈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작가였던 형이 어려움을 겪다가 작은 카페를 열겠다고 하고서 고군분투하다가 죽게 됐다는, 주인공은 잘 모르고 있었던 비밀을 알게 되자 그는 왜 어머니가 자꾸 자신에게 같은 전화를 하게 되는지 알게 된다. 아픈 손가락이었던 형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어머니는 마음이 불편한 상태로 형과 목소리가 비슷한 자신을 형이라고 여기고 계속해서 덧없는 전화를 이어가고 있었던 게다.


'형은 죽었어요'라고 말하는 게 무엇보다 합당한 일이건만, 결국 주인공은 어머니에게 자신이 형이 아니라고 하던 말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자신이 형인 척 연기를 하기 시작한다. 돈 문제가 다 해결됐고, 작은 카페를 열게 되었다는 그런 거짓말을 하면서 말이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혹은 이콘에게 때로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마음의 세계에는 불합리함을 품고도 합당하게 보이는 일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고마운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슬픔을 함께 나누며 그걸 위해 불필요하고 군더더기처럼 보이는 일을 하게 되는 그런 무수한 일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자칭 합리적인 소비자로 혜택만 뽑아가는 체리 피커나 가성비만을 최우선시하는 사람들을 대중이 '국밥충'이니 하는 별명으로 비아냥대는 까닭도 마음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성만을 강조하는 오만한 자에 대한 미움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마음의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반증이기도 할 테고.


그래서 요즘 나는 어머니에게 더 이상 제사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좋은 경치가 보이는 편안한 쉴 곳이든, 기억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추모에 관한 것이든, 나는 어머니가 느끼기에 마음이 편한 것을 선택하기를 바란다. 내가 무슨 좋은 것을 권한다고 해도 내 기준일 뿐이고, 결국 마음이 편치 않다면 좋은 게 아니니까. 


무엇이 최선인가에 대한 질문은 항상 어렵게 다가오지만, 적어도 마음에 관한 일 만큼은 나는 편안한 것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어머니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어떤 상태에서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꾸준히 관찰하는 게 진정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정성껏 제기를 닦고 치우며, 상차림을 돕거나 본 적 없는 외할머니의 이름을 지방에 한 자씩 새기는 일은 해가 갈수록 능숙해지고 있다. 제사를 지내는 도중에 이따금 촛불이나 향이 흔들리면 신을 믿지 않는 나도 '할머니가 오셨나봐' 같은 거짓말도 하게 되는, 평온을 위한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제사라는 거창한 예법이 아니라 그저 생전에 불행했던 어머니의 영혼에게 따뜻한 한 상을 차려주는 딸의 마음을 두 팔 거둬 돕는다는 심정으로. 소중한 사람의 행복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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