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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민 Oct 26. 2024

가짜 정의감


우리 집 앞에는 발달장애인 시설이 있다. 자폐 스팩트럼 장애,  지적장애, 다운증후군을 앓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형태의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곳에 재활치료를 받기 위해 온다.


최근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인기를 끌어서 평소보다 이 시설을 더 눈여겨보게 됐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그곳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오직 하나다. 드라마 속에서 보던 예쁘고 똑똑한 우영우가 아닌, 난데없이 고함을 지르거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이 사람들을 곁에서 꾸준히 도울 수 있겠느냐고.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다.


골방에 틀어박혀 느슨한 관계를 추구하는 나 같은 인간에게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돕는 일이 적성에 안 맞기도 하지만, 소위 '내로남불'이라고 하는 그 감정도 느끼고 싶지 않다. 단지 드라마 속에서 자폐인 변호사를 돕는 이들의 멋진 모습만을 보고 그것이 나의 모습인양, 실제로 실행할 깜냥도 안되면서 이타적인 인간임을 억지로 포장하는 것도 싫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나보다 더 전문적이고 유능한 전문가들에게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잠자코 지켜보면서 외지인이나 동네 주민들이 이들을 배척하지 않게 정치적인 지지를 보내주는 정도다.


정의롭고 남을 잘 돕는 사람들은 언제나 멋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때로, 그 '멋있는 모습'에만 집중해서 그 이면에 어떤 고통과 수난이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마치 귀여워서 입양했다가 병이 생기거나 대소변을 치워주는 일이 귀찮아지면 유기해버리는 반려동물처럼, 꼭 정의로움이 아니더라도 나를 멋지게 꾸며줄 수 있는 가치들을 쉽게 둘러 쓰려고 한다.


대학 시절 나는 한 친구와 친일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은 모조리 처벌받아야 하고 지탄받아야만 한다며 열변을 토하던 내게 친구는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았으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다. 정말 나라를 팔아먹고 이웃을 지옥에 빠뜨린 악마 같은 인간들도 분명히 있었지만 아무런 힘이 없어서 마지못해 복종하거나, 자기 자신이 부역하고 있는지도 모른 체 악행에 가담하거나 혹은 모든 걸 알고 있었지만 사소한 시비로 목숨이 오가는 와중에 정의를 외칠 수 없었던 사람들까지 그 모든 사람에게 단죄를 내리기란 진실로 어렵다.


어쩌면 꽤 많은 사람들이 그때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한 조상들 덕에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조상이 독립운동으로 해외에 망명했거나 일본군에게 잡혀 죽임 당한 게 아니라면 그들이 어떻게 살아남았을지 생각해보는 일만으로도 단칼에 정의를 울부짖는 말이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가 않는다. 만약 다시 암흑의 시기가 도래한다면, 처형된 사람들이 피가 흐르는 기다란 칼날 앞에서 내가 그때도 정의를 울부짖을 수 있을지는 과연 미지수다.


그러니까 나는 책에서 마땅히 그래야 하며, 그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하는 일에 마음을 빼앗겨서 '그런 척'을 했던 것이다. 세상에 부조리한 일들이 넘쳐나는데도 모든 것이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되지 않고 적당히 뒤섞인 채 곤죽처럼 사회에 타설 되어 단단히 굳어져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도 때로 비겁했고 겁 많은 인간으로 살기도 했었음을 인정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년 뒤에 한 직장에서 부조리한 일을 당한 동료에게 '당하지 말고 어디든 고발하세요'라고 했던 나는 '어디다 고발해야 하는데요?'라는 말을 듣고 말문이 막힌 적이 있다. 공론화를 하자니, 부조리를 일으킨 대상이 받을 처벌의 수준이 눈에 훤하고, 그 때문에 받게 될 동료의 2차 피해 역시 눈에 선했다. 무엇보다, 일이 커지게 되었을 때 내가 그 동료를 끝까지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입을 닫은 나의 등 뒤로 동료는 조용히 사라졌다.


막상 세상을 살아보면 세상이 생각보다도 더 좀스럽고 서운하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꼭 생계가 걸린 일이 아니어도 단순한 질투심이나 시샘 때문에 곤혹스러운 일을 당하기도 한다. 웹사이트에 달리는 댓글이나 SNS를 보면 세상은 참 정의롭고 밝은 곳이구나 싶다가도 피부에 와닿는 현실에서는 정반대의 일을 목격할 때도 많다. 물론 거기에 거창한 선과 악의 사투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들 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벌어지는 살얼음판이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럼 그냥 보고만 있으란 말이오!" 
"당신이 나가면 우린 다 죽소. 제발 그냥 눈감아주시오." 
영화 <관상>에서 진형은 부조리를 보고도 참을 수밖에 없다


왜 머리로는 정의를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잘 되지 않을까. 그건 모든 정의에는 책임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불특정 다수가 되거나 멀찍이 떨어져 정의를 말하는 건 쉽다. 어차피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내가 책임질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눈앞에 벌어지는 일에는 분명히 나의 일부를 걸어야 한다. 그게 평판이 되었든 실질적인 불이익이 되었든 간에.


영화 <관상>에는 글공부를 하던 진형이 붓을 팔러 나갔다가 감찰관의 부도덕한 행위를 보고 울분을 토하다 '당신이 나가면 우린 다 죽소'라며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상인의 말을 듣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장면이 나온다. 설령 나 자신이 직접 불이익을 감당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가 타인의 안녕을 해친다면 이 역시 쉽게 나설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의를 지킨다는 건 이처럼 실로 무겁고 복잡한 일이다. 하지만 이따금 사람들이 둘러쓰는 정의감은 진짜 정의와는 다른 목적을 띠기도 한다.


2015년에 파리 테러 사건 때 연예인과 셀럽들을 필두로 많은 사람들이 '프레이 포 파리' 이미지를 개인 SNS에 올리며 추모 열풍을 이어갔는데 2017년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 더 큰 테러가 벌어졌을 때는 아무도 추모를 하지 않았다. 지적이고 우아한 파리지앵의 고통은 분담하고 막장 국가가 되어버린 소말리아의 고통은 분담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모순을 떠안아 가면서 쓰는 정의감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그건 키오스크에서 '장바구니 추가'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어떤 이미지를 소유하는 데 있을 것이다.


부조리한 어떤 사태를 보고 그저 입을 닫으라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어떤 정의를 대함에 있어서 그 실천의 어려움과 무게를 안다면 적어도 위선적인 태도는 지니지 않을 수 있다는 소리다.


'나는 베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야!'라고 떠들던 사람이 막상 회식 자리에서 지갑을 닫고 있으면 그 자신이 얻고 싶었던 '통 큰 사람'이란 이미지는커녕 좀스러운 인간이 되고 마는 것처럼, 훌륭한 인간의 덕목을 실제 온몸으로 고민해보는 과정도 없이 '말'로 얻으려 하다가는 분명히 곤경에 처하는 순간이 닥친다.


그러니까 어떤 사태에 대해서 우리가 직접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다. 다만 진짜 정의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이 단순한 선언으로 술술 풀릴 곳이 아님을 알고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을 해야 할지 지각하는데서 첫 발을 뗄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생각과 말을 좀 더 신중하게 하게 되고, 정말 사태가 벌어졌을 때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게 결국은 정의로 관철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내가 '양치기 소년'이 되는 일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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