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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민 Oct 26. 2024

열등감의 젠이츠


일본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에는 재밌는 캐릭터가 하나 있다. 그 자신이 혈귀 사냥꾼이면서 막상 혈귀만 보면 겁에 질려 도망치려고 애쓰는 사람. 그렇게 커다란 공포감에 짓눌려서 기절하기 직전이면 그는 갑자기 자세를 바꿔 발도 자세를 취하고는 나지막이 외친다. "번개의 호흡 제 1형, 벽력일섬!"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의 동료이자 친구로 등장하는 아가츠마 젠이츠는 <귀멸의 칼날>에 등장하는 몇 가지의 호흡들 중에서 '번개의 호흡'을 구사하는 검객이다. 그런데 다양한 형태의 기술을 구사하는 동료들과는 다르게 젠이츠는 단 한 가지 기술, '벽력일섬' 밖에 쓰지 못한다.


기술이 하나밖에 없으니 금방 혈귀들에게 당할 것 같고, 젠이츠 그 자신도 그 사실 때문에 늘 불안해하며 혈귀를 두려워하지만, 사실 이 기술은 번개의 호흡 중에서도 극한의 오의를 가진 기술이라 하나만 있어도 충분할 만큼 강력하다.


눈으로 보지도 못할 만큼 빠른 발도에 번개의 힘을 실어 상대를 단 한 방에 섬멸해버리기 때문에 그 자신도 기술을 쓴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를 정도다. 젠이츠는 항상 혈귀 앞에서 공포에 떨다가 기절하기 직전에 벽력일섬을 쓰고는, 다시 깨어나 죽어있는 혈귀 시체를 보고 누가 그랬냐며 또 기겁을 하곤 한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 때문에 젠이츠는 작중에서 개그 캐릭터를 맡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어쩌다 저 지경이 됐을까 싶기도 하다.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살고 싶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본능적으로 생존의 길을 찾는 사람. 아마 젠이츠는 <귀멸의 칼날>에 등장하는 그 누구보다도 가장 강력하게 삶을 갈망하는 캐릭터일 것이다.


"부모가 없는 난 누구의 기대도 받지 못했다. 누구도 내가 무언가를 손에 넣거나 성취할 미래를 꿈꿔주지 않았다."


귀살대 전원이 고아인 상황에서,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다 혈귀에게 가족을 전부 잃은 탄지로와는 달리 젠이츠는 가족을 가지지도 못했고 자라면서 온갖 냉대와 무시를 받으며 살아간다. 한때 귀살대 최강 대원으로 '주'의 호칭을 받았던 스승 쿠와지마 지고로만이 젠이츠를 거두어 주지만 그마저도 스승의 편애를 받는다며 사형인 카이가쿠에게 미움을 받는다.


젠이츠보다 먼저 번개의 호흡 계승자로 수련 중이었던 카이가쿠는 번개의 호흡 제1형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형을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들어온 젠이츠가 '제1형 벽력일섬'을 구사하자 가뜩이나 미운털이었던 젠이츠를 더더욱 싫어하게 된다. 심지어 젠이츠가 노력파인 그를 존경하고 있음에도 먹고 있던 복숭아를 얼굴에다 던지며 '너 같은 놈이 대단한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못마땅하다'며 면전에서 핀잔을 주기까지 한다.


가뜩이나 자존감이 바닥이었던 젠이츠는 사형에게 그런 소리까지 듣자 열등감이 극에 달한다. 그의 말대로 재능이 없는 자신이 뛰어난 스승 밑에서 교육받는 게 맞는 일인지, 아무리 노력해도 기본 검식인 '제1형' 밖에 구사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


그런데 사실 여기서 더 큰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쪽은 젠이츠가 아니라, 오히려 젠이츠를 구박하던 사형 카이가쿠 쪽이다.


<귀멸의 칼날>과 다소 비슷한 분위기의 또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 <누라리횬의 손자>에도 카이가쿠와 비슷한 캐릭터가 한 명 나오는데, 검술로 혈귀를 제압하는 <귀멸의 칼날> 귀살대와 달리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퇴마사들은 음양술이라는 일종의 도술을 부려 요괴를 제압한다. 


작중 등장하는 아키후사는 3세에 요도를 만든 천재 음양사로 케가인 가의 차기 당주가 확실시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대요괴를 쓰러트리기 위한 주술, '식신 파군'을 쓸 수 없었으며, 어느 날 갑자기 한참 아랫 뻘 후배인 유라가 파군 소환에 성공하면서 그의 차기 당주 자리는 위태롭게 된다.


대요괴 하고로모기츠네의 환생을 저지하려고 대를 이어오던 음양사 가문에서 파군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곧 당주를 의미하는 일이었다. 타고난 재능에 노력까지 겸비했지만 당주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한 아키후사는 파군 없이도 대요괴를 쓰러트릴 수 있다며 금지된 술법에 손을 뻗치면서 결국 그 자신이 요괴나 다름없는 금술을 부리게 된다.


후에 진짜 환생한 하고로모기츠네와 대적하게 된 아키후사는 그가 만든 술법이 대요괴는커녕, 대요괴의 말단 부하에게조차 통하지 않자 도리어 인간의 어두운 마음에 깃드는 요괴에게 몸을 빼앗겨 아예 반요 상태가 되고 만다. 그리고 그는 파군을 꺼내 든 유라 앞에서 '네가 아니라 내가 당주여야 한다'며 끝내 요괴가 아닌 사람을 향해 칼날을 휘두르기에 이른다.


아직 애니메이션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코믹스로 완결된 <귀멸의 칼날> 후반부에서 카이가쿠 역시 젠이츠에게 열등감을 느끼다 못해 결국은 키부츠지 무잔이라는 혈귀 대장에게 피를 수혈받고 요괴가 되어버린다. 어찌 보면 이런 모습들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클리셰라고 할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말하려는 지점은 같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인간의 말로는 결국 '괴물'이 되는 것이라고.


젠이츠나 그의 선배 카이가쿠나 열등감을 갖고 있는 건 똑같지만, 같은 열등감이라도 젠이츠의 것이 차라리 낫게 느껴지는 건 열등감을 표출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젠이츠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밖으로 꺼내는데 주저함이 없지만, 카이가쿠나 아키후사는 그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열등감을 안으로 꽁꽁 싸맨다.


사실 이 세상에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다. 신이 아닌 바에야 나보다 나은 사람은 반드시 있고, 더 나은 상황은 언제든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없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이 열등감이 나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될지, 괴물로 만드는 사악한 주술이 될지 결정될 뿐이다.


<귀멸의 칼날 : 무한 열차 편>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에는 불꽃의 호흡을 다루는 염주 렌고쿠 쿄주로와 아버지가 열등감을 놓고 갈등을 빚는 장면이 나온다. 


쿄주로의 아버지는 불꽃의 호흡으로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해의 호흡'이라는 더 근원적이고 높은 경지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 자신이 그 경지에 다다르지 못함을 알게 된다. 그래서 주의 자리도 팽개치고 온종일 방구석에 누워 '해의 호흡'에 관한 책만 읽는 폐인이 되어 자식이 염주가 되어 돌아왔는데도 '어쩌란 말이냐'는 식으로 찬바람을 분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아버지 밑에서 쿄주로 역시 흔들릴 법도 한데 그는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걸 그 자신의 열등감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그저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해의 호흡'이라는 더 높은 경지가 있다고 해도 그 자신이 갈고닦는 '불꽃의 호흡' 또한 정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때 쿄주로의 아버지는 이미 자신이 불꽃의 호흡의 경지에 오른 달인이었으면서 그 힘보다 나은 것이 있다는 이유로 자기 자신의 능력마저 무가치한 것으로 스스로 판명해버리는데 반해, 쿄주로는 자기가 할 수 없는 호흡은 어쩔 수 없다고 여기고 할 수 있는 일을 더 갈고닦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내가 가질 수 없는 어떤 '부재'에 대해서 피해의식을 느끼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지가 이 두 부자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징징거리는 것처럼 보일지언정 '번개의 호흡'을 모두 구사하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부족함을 꺼내는 젠이츠가 열등감을 이겨내는 데는 더 좋은 기질을 가졌다고도 볼 수 있다. 문제가 뭔지를 알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알기에 도움을 주기에도 좋고, 스승인 지고로 역시 그런 점에 초점을 맞춰 젠이츠를 훈육한다.


"젠이츠, 끝까지 갈고닦아라. 울어도 된다. 달아나도 된다. 단, 포기하지 마라."


젠이츠의 스승 지고로는 제자에게 '울어도 된다'고, '달아나도 된다'고, 젠이츠가 훈련이 힘들어 도망갈 때면 나무라지 않고 일단 달아나게 한 다음 매번 다시 잡아온다. 가뜩이나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이걸 감추려다가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지만 젠이츠의 스승은 그걸 알기에 오히려 열등감을 표출하는 걸 더 권장한다. 다만, 열등감으로 도망친 제자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방치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고 그 자신의 가치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혈귀만 보면 나자빠지는 우스꽝스러운 혈귀 사냥꾼이 된 젠이츠지만, 결과적으로 젠이츠는 귀살대의 정예 대원이 되었고, 무엇보다 그렇게 무섭고 두려워하면서도 검을 놓지는 않는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의 말대로 '벽력일섬'밖에 쓰지를 못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벽력일섬을 연발로 쓰는 '벽력일섬 6연발' 같은 전혀 다른 차원의 기술을 쓰기도 한다.


그러니까 결국 부족함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나 자신'이 아니라, 내게도 '벽력일섬' 같은 독특한 무엇인가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거다. 부족한 것, 가지지 못한 것, 그런 것들은 전혀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너무도 당연한 일이며, 심지어 그게 열등감이 되어서 울거나 도망가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된다. 


다만, 내가 못나거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은 하지 말고 지금 잘하고 있는 걸 조금 더 잘할 수 있다는 정도로만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언젠가 험한 세상이 무서운 몰골을 하고 닥쳐온다한들 겁에 질려 기절한 채로 '벽력일섬'을 쓰지 않아도 될 일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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