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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민 Oct 26. 2024

나이가 들수록 쉽게 해서는 안 되는 말


3년 전 나는 지역의 한 재단에서 주관하는 청년예술가 모임에 나가 멘토로 초빙된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저는 작년에 아는 체를 했다가 크게 덴 적이 있어서 말을 아끼겠습니다. 어딜 가나 전문가는 다 계시더라고요."


청년들에게 조언을 해주러 온 자리에서 말을 안 하겠다니 그럼 이 자리엔 대체 왜 온 걸까 싶다가도, 지나고 보니 현명한 행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멘토라곤 해도 각 분야에서 적어도 수년 동안 예술활동을 해온 청년들 앞에서 단지 다니는 직장이 '문화 및 예술' 카테고리에 포함됐다는 이유만으로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일단 뭐라도 조언해 보라고 하는 건 과연 부담스러운 일이다. 본인을 그저 직장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더 그럴 테고 말이다.


설령 그런 것을 개의치 않는다고 해도 예비 직장인에게 선배 직장인으로서 직장 생활이나 사회생활에 관한 것이면 모를까, 예술가들의 시선에서 딱 맞는 조언을 해주기도 힘들다. 예컨대 일식집 주방 보조가 초밥 만드는 법을 배우려고 도마를 닦고 있었더니 주방에 초밥 장인 사부가 아니라 어판장 경매사가 들어온다면 어떨까. 뭐, 둘 다 한 분야의 전문가이긴 하고 큰 카테고리로 보면 똑같이 생선 만지는 일이긴 한데 뭔가 너무 다르지 않나.


그래도 자리가 마련되면 아무 말이라도 하게 되는 게 사람 심리인데, 그렇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나온 경우는 또 처음이라 무척 신선했다. 살면서 글을 한 번도 안 써본 것 같은 사람도 내게 '작법 강의'를 열어주는 일이 종종 있는지라, 허락까지 받은 상황에서 겸양하는 게 대단해 보였다.


비단 이런 자리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잘 모르는데 아는 척을 하게 될까 봐 말을 아끼는 것은 중요하다. 이건 굳이 따로 부연을 달지 않아도 너무 당연한 이야기고 사람들은 여기까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것은 잘 모른다. '판에 박힌 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 말을 아끼는 것도 꽤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운전기사로 취업한 기택이 뒷자리에 태운 사장 동익이 아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걸 듣다가 불쑥 이런 말을 내뱉는다.


"그래도 사랑하시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말에 동익의 표정은 묘하게 일그러진다. 떨떠름하게 '아이, 그럼요. 사랑하죠. 사랑이라고 봐야지.'라고 말하는 그의 대답에는 감춰진 수백 개의 이유가 동시다발적으로 느껴질 만큼 뚜렷하게 전해진다.


당장 상황만 놓고 보면 '답정너' 식으로 정해진 대답을 기대하는 기택의 말에 동익은 상하관계가 어긋남을 느낀다. 보스가 아내의 험담을 하고 있는 와중에 그걸 정면으로 반박하는 질문은 동익의 행위를 질타함과 동시에 가르치려 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동익은 기택이 자신의 의견을 수긍하지 않는다는 걸 느낀 순간부터 기택이 사람들에게 괜한 말을 전해 불화의 씨앗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더 깊은 지점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애초에 동익이 아내 연서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쇼윈도 부부일지도 모르고, 동익이 속으로는 아내와 헤어질 결심을 슬금슬금 다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심지어 내연녀라도 있다고 하면 기택은 개인 기사로서 더더욱 동익에게 해서는 안 될 말(윤리적으론 옳을 지 몰라도)을 하게 된 셈이다.


설령 동익의 부부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도 문제다. 이전 기사와는 신뢰를 바탕으로 내뱉던 사담이었을 것도 그의 말 한마디에 별 이야기를 다 하는 좀스런 남편이 되어버린 게다.


여차저차 기택의 당연해 보이는 듯한 말은 동익에게 불편을 야기한다. 그 말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지 간에, 한 가지 상황에도 개개인은 여러 가지 사정을 떠안고 있기에 어디서 역린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현실이라고 다를까.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에서 오랜 시간 액션 배우로 명성을 날린 배우 밀라 요보비치는 오래전 한 TV쇼에서 사회자의 질문에 잠깐 대답을 이어나가다가 물 잔을 끼얹고 스튜디오 밖을 나간 적이 있다. 감옥에 간 아버지에 대해 질문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사회자가 기습적으로 그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명절 때마다 가족끼리 불거지는 마찰들을 생각해 보자. 취업은 했니, 결혼은 했니 하는 부류의 질문들은 질문만 놓고 보면 딱히 무례하다거나 이상할 질문은 아니지만 짜인 판에 강요가 되는 데서 문제가 시작된다.


만약 무난히 취업해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이 장성하는 것을 지켜본 사람이 조카들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면 그 자신의 기준으론 당연한 질문을 한 셈이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취업이나 결혼이 맘처럼 되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인생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또한 오해를 떠나서 판에 박힌 질문은, 그 사람을 그런 테두리에 가두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수긍이라는 도장을 찍는 순간 자경단이 되어 그의 삶을 감시하게 된다. 테두리 안과 밖의 영역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며 영역을 벗어난 사람들을 비정상 취급하며 반대로 우월감을 느끼거나,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선을 긋고 배척하는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결국 그게 심해지면 '당신은 틀리고 나는 옳다' 식의 악질적인 유도 심문까지 튀어나온다. 잘 모르는 상태로 상대를 고정된 틀 안에 집어넣거나 의도는 없지만 그 자신의 좁은 시야로 판단을 내린 경우라면 한두 번 실언이 오가고 말지만, 질문 자체가 상대를 영역 밖으로 밀어내고 자신의 당위성을 획득할 목적으로 나온 경우에는 공격성 마저 띤다.


그러나 삶에 당연한 것이라는 건 없다. 오후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카페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는 사람의 발밑 지구 반대편에서는, 군인이 드론의 폭탄 공격을 피해 참호를 뛰어다니기도 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지금 내 상황에서 말이 안 된다고 생각되는 일도 공간만 옮기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판에 박힌 질문'을 하지 않으려면 먼저 '판에 박힌 생각'을 확인해야 한다. 영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주인공 에그시가 물이 차오르는 생활관에서 혼자서 '문을 열면 되잖아?'라고 문고리를 잡았다가 문이 열리지 않아 당황하는 바로 그 장면처럼, '방을 나가려면 문을 연다'라는 너무도 당연한 행위조차 통하지 않는 상황이 있음을 지각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말실수를 자주 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면 자기 세계관이 확고한 경우가 많다. 간단한 생활양식부터 정치적 식견까지 다른 생각이 껴들 틈을 만들지 않고서 단단한 얼음벽을 세워 무슨 말이나 상황이 들어와도 죄다 미끄러진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오랜 시간 성취했다는 그 자부심은 박수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그 길이 모두에게 맞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야 한다. 마치 축구는 잔디밭에서 하는 게 좋다고 하는 사람이 육상 선수까지 잔디밭에서 뛰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결국 말조심은 말 자체를 신경 쓰기보다는 세상을 보는 시선과 태도에 달렸다. 내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게 타인의 삶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일인가.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침묵이 아니다.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침묵이다. 

3년 전 멘토 프로그램에서 본 그 멘토의 가르침은, 아직도 유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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