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셉션>의 주인공 코브는 의뢰인에게 '상속받은 아버지의 기업을 해체하게 만들기'라는 과제를 받고 꿈을 설계할 때 팀원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난 아버지 제국을 박살 낼 거야'... 분명 로버트는 이 아이디어를 부정하려 하겠지. 우리가 무의식 깊은 곳에 심어야 하는 이유야. 무의식은 이성이 아닌 감정에 좌우되잖아? 우리는 이 부분을 감정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해."
"그럼 이건 어때? 아버지 회사를 공중 분해하는 건 아버지한테 엿 먹일 수 있는 거잖아."
"아니, 내 생각엔 긍정적인 감정이 언제나 부정적인 감정을 이겨. 우리는 화해를 갈망하면서 카타르시스를 얻으니까."
부정의 감정으로 꿈을 설계하자는 임스의 제안과, 긍정의 감정으로 꿈을 설계하자는 코브의 제안은 단순한 차이 같지만 엄청나게 다르다. 임스의 제안을 따르면 로버트의 꿈을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으로 채워놓고 그를 공격할 수 있게 하거나 증오할만한 서사를 짜야한다. 안 좋은 추억을 부각하고, 현실에서 받은 차별이나 설움을 더 강조하면서 아버지를 적으로 생각하고 복수할 생각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복수라는 감정, 부정의 감정은 그것이 달성되는 순간 거짓말처럼 그 탄력을 잃는다. 모든 것이 허무해지고 지속성을 갖기 힘들다. <악마를 보았다>의 주인공 김수현이 왜 악마를 처단하고 나서도 울음을 터트렸을까. 악마를 고문하고 괴롭히는 과정에서 그 자신도 악마와 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아내를 죽인 살인마에 대한 복수라고 해도 살을 찢는 고통으로 사람을 기절시켰던 그런 끔찍한 행위가 사라진 게 아니니까.
큰 잘못을 했어도 일단 부인하는 게 사람의 심리다. 그만큼 곁에 두고 싶지 않은 부정의 감정을 나 스스로 이끌어가야 한다면 그 고통을 과연 계속 끌고 가고 싶을까? <인셉션>의 타깃이 꿈을 깨고 나서도 같은 생각을 계속하게끔 하려면, 작전 성공을 위해서도 코브의 설계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긍정으로 쓴 코브의 시나리오는 '로버트의 아버지가 사실은 아들을 사랑하고 있었고, 못난 자신을 닮지 말라고 일부러 냉랭하게 대했다'는, 부자간의 근본적인 사랑을 핵심 씨앗으로 두고 곁가지를 펼쳐나간다. 그리고 3단계로 이루어진 로버트의 꿈은 '납치 > 각성 > 탈출'의 순서를 가지고 부정적인 상황에서 점차 긍정적으로, 주도적인 상황이 되게끔 교묘히 설계된다.
영화 <인셉션>이 '모든 것을 바꿀 단 하나의 간단한 생각'으로 한 사람의 결말을 바꾸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삶의 궤적은 분명히 달라진다. 김수현이 악마에게 복수를 하면 할수록 더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 코브가 로버트를 꿈속으로 끌고 갈 때마다 불가능한 일을 현실로 만들게 된 것은 모두 그 상반된 속성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숨겨진 힘' 때문이다.
생각이 바뀌면 현실이 바뀐다'의 원리를 깨닫기 전에 우리는 언어의 속성을 살펴봐야 한다. 대체로 우리의 생각을 전달하는 핵심 단어는 '짝'을 갖고 있다. 가령 '신발을 신었다'라는 문장을 살펴보자.
신발을 신었다는 상황에는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단어가 따라붙기 마련이다. '달린다', '뛴다' 같은 동사에서부터 '멋진', '가벼운' 같은 형용사도 떠오른다. 우리가 인간의 발에 씌우는 다양한 형태의 보호대를 '신발'이라고 부르기로 정했기에 당연히 신발을 떠올리면 발과 관련된 단어가 떠오르고, 발이나 다리가 할 만한 행동들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우리가 어떤 단어를 떠올리고 그것으로 문장을 만든다고 한다면, 그것과 관련된 수많은 단어와 구절, 상황이 함께 따라붙으면서 거대한 말풍선이 되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당연히 따라 불려 온 단어들도 거기에 어울리는 단어와 구절이 있고, 그렇게 연쇄작용은 무의식 영역까지 침범하면서 엄청나게 범위가 커진다.
긍정적인 말, 부정적인 말도 역시 마찬가지다. 부정의 말을 떠올리면 당연히 거기에도 어울리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 덩어리들은 같은 부류를 한없이 끌고 온다. '울고 있는 사람' 같은 문장을 떠올리면 당연히 '슬픔', '좌절', '지친다', '우울함' 같은 단어가 따라붙게 되고 묘사 역시 '슬프게 우는', '다쳐서 우는' 같이 울고 있는 행위에 어울리는 상황을 불러오게 된다.
단어 하나에 묶여있는 말덩어리가 한꺼번에 내 생각 속을 차지하게 되고, 무의식 중에 연상작용을 하게 되면서 생각 자체가 바뀌는 일은 단순히 머릿속 생각에서 그치지 않는다. 짐 캐리가 등장하는 영화 <예스맨>(2008)에서 'YES'로만 대답하게 된 주인공의 일이 갑자기 술술 풀리게 된 게 영화적 상상력에 불과한 것일까? 언어가 기본적으로 생각의 표현 방식이라는 걸 기억한다면, 우리가 선택한 언어가 곧 어떤 행위에 대한 생각이며, 그 행위 역시 거기에 걸맞은 수많은 행동과 상황들을 불러들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번 '예스맨'이 되어보자. 누군가 당신에게 '대통령이 될 수 있나요?'라고 묻는데 예스라고 해보면 어떨까. 평소라면 당연히 말도 안 된다는 소리를 할 테고, 우리는 그게 정말 힘든 일이란 걸 잘 알고 있지만 예스맨이 되어 '된다'는 단어를 불러오기만 해도 대통령과 관련된 단어가 물밀듯이 몰려오는 것을, 그에 따른 행동도 같이 딸려오는 걸 느낀다. 무슨 당에 가입해 정당 활동을 하는 모습을 떠올려 본다거나, 시민 사회에서 봉사하는 자신의 모습도 발견한다거나, 때로는 정치 현안을 둘러보는 자신을 상상해 볼 수도 있다. 안 된다고 하면 떠오르지도 않을 것들이 일단 된다고 하면 '뭘 해야 할지' 아이디어라도 떠오르게 된 것이다.
말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만드는 일련의 '실행 코드'다. 선대 인류가 무수한 위험에 직면하면서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가 축적된,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위를 하게끔 지시하는 생각의 또 다른 형태라는 말이다. 긍정적인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당연히 부정적인 말을 자주 하는 사람보다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 좋은 상황에 대한 숨겨진 경험을 공짜로 얻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도 한 가지 상황을 좋게 해석하는 사람과 나쁘게 해석하는 사람, 어느 쪽을 가까이하던가. 매사 투덜거리며 될 일도 안 되게 만드는 사람은 고립되지만, 긍정을 낳는 사람은 긍정을 추구하는 또 다른 사람들과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낸다.
'나는 멍청하다'
'나는 똑똑하다'
두 가지 문장을 하나씩 곱씹어 보자. 단어 하나만 바뀌었을 뿐인데 느낌부터가 다를 것이다. 연상되는 것도 다를 것이고, 그에 따른 행동도 정반대의 것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초두효과처럼 어떤 문장을 먼저 읽었느냐에 따라 생각이 바뀌기도 한다.
긍정적인 말을 자주 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가 윤리적으로 바른 인간이 되기 위해서, 혹은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격식이나 매너를 중시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단어 하나하나가 공유하고 있는 좋은 말덩어리가 우리가 언어를 배운 만큼이나 무궁무진하게 있으며, 그 언어들은 모두 어떤 행동과 경험을 지시하고 있기에 결국 우리의 삶 자체를 그런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인생을 건 모험에서도 '긍정은 부정을 이긴다'는 코브의 말처럼, 우리가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그런 말을 하게 될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의 말과 생각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방대하게 얽혀있으며 그 모든 말과 행동들이 단어 하나에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바꿀 단 하나의 간단한 생각'은 입천장의 작은 바람에 모두 담겨있다.